TYPE-MOON에서 제작한 PC용 18금 남성향 전기활극 비주얼 노벨 『Fate/stay night』의 PS2 이식작입니다. 수많은 빠와 까(이 사람들은 작품 자체보다 극성스런 빠들에 대한 반감 때문에 까는 것 같지만…)를 동시에 거느리고 있는 인기작. 요즘은 시들해졌는지 예전처럼 빠와 까의 대립이 심하지 않은 것 같네요. 어쨌거나 이 작품은 이미 TV판 애니메이션이 제작되었고, 극장판 애니메이션도 공개되었다고 합니다. 요즘 애니메이션화 된 『Fate/Zero』가 화제라 방치 중인 걸 다시 잡아 봤어요. 중간에 손 놓고 한참 지나서 이전 내용이 가물가물하긴 하지만…;;
무음성이었던 PC판과 달리 PS2는 TV판 성우를 그대로 기용하여 주인공 에미야 시로를 포함해 풀보이스화, PS2판만의 오리지널 오프닝 역시 추가되었는데 동영상 퀄리티가 제법 괜찮군요. 아무래도 온 가족의 PS2 이식작이다보니 빠지거나 수정된 이벤트가 존재하고, 신규 이벤트와 CG 등도 추가되었다는데 PC판을 해본 적 없어서 어느 부분이 어떻게 다른지 잘 모르겠습니다.
- Fate: 세이버
우연히 최강의 서번트 세이버와 계약을 맺어 성배전쟁에 참전하게 된 시로. 마술사로서도 마스터로서도 미숙한 시로의 입장에서 성배전쟁의 대략적인 개요를 알게 되는 루트입니다.
모두를 지키는 영웅이 되고자 하는 이상을 마음속에 품은 시로와, 시로의 이상인 영웅이 되었지만 이를 부정하고 리셋시키고 싶어하는 세이버의 이해와 갈등과 성장 이야기. 세이버는 과거 자체를 바꿀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자신을 긍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으니 해피 엔딩.
그나저나 집요하게 세이버를 따라다니는 스토커 길가메시가 인상적이었네요. 성격파탄자에 변태이긴 해도 비주얼적 측면에서 보자면 시로보다 길가메시가 세이버랑 세워놓으면 그림이 되는데 좀 아쉽습니다. 세이버 성격상 둘이 잘될 일은 죽었다 깨어나도 없겠지요.
- Unlimited Blade Works: 토오사카 린
학원의 우등생이자 시로가 동경하는 대상인 토오사카 린은 후유키 시를 관리하는 마술사 집안 토오사카가의 당주입니다. 서번트 아처와 계약을 맺어 성배전쟁에 참전한 린은, 아무것도 모르는 시로에게 도움을 주기도 하고 공통의 적을 두고 시로와 협력하기도 하며, 시로에게 큰 영향을 줍니다. 사실 린이 없었다면 시로는 성배전쟁에 참전하기도 전에 황천행이었겠지요.
이 루트에서 린이 히로인이지만 함께 역경을 헤쳐나가는 파트너 포지션이고, 시로와 아처가 주역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시로와 아처의 관계성, 이상과 현실의 괴리, 확고한 의사가 결여된 일그러진 이상 끝에 찾아온 절망… 과거를 부정하고 리셋하고 싶어한다는 점에서 아처는 결국 세이버와 판박이네요. 세이버의 태도를 탓하던 시로의 종착점이 아처라는 사실이 아이러니합니다.
이야기가 시원스러운 편이었고, 린도 제법 귀여워서 나쁘지 않았습니다. 린과 아처 커플 좋네요. 사실 시로가 어떤 선택을 하든 아처에게는 린이 소중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Fate」 루트에서 린과 시로를 구하기 위해 버서커와 맞서는 마지막 모습이나, 「Heaven’s Feel」 루트에서 린에게 쓸쓸하게 이별을 고하는 모습도 짠했고… 제 안에서 시로와 아처는 완전 별개 인물이에요.
그 외 린에게 호감을 보이고 협력한 랜서도 기억에 남습니다. 린 중심으로 여러 남정네가 꼬이니 이거 어찌 보면 역하렘스러운 것 같기도 하고… 린 중심으로 여러 커플링 나오네요.
- Heaven’s Feel: 마토 사쿠라
시로의 친구 신지의 여동생이자 시로를 매우 잘 따르는 후배 사쿠라. 시로는 성배전쟁과 관계없는 사쿠라의 일상을 지켜주기 위해 노력하지만, 사쿠라가 성배전쟁의 시궁창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시로는 오로지 사쿠라를 구하기 위해 힘쓸 것을 결심하는데…
이 루트는 성배전쟁의 숨겨진 모든 진실이 드러나고 이야기가 완전히 매듭지어진다는 점에서 진엔딩이라 할 수 있겠죠. 소중한 한 사람 지키기 위해 자신의 이상을 버린 시로. 이 루트는 앞서 루트에서 나왔던 시로의 이상에 대한 하나의 결론이라고 하는데… 시로가 실패한 미래상 아처와 대립하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이상을 너무 쉽게 내던지는 듯해서 좀 위화감이 느껴지더라고요. 그 이상이 그간 시로의 정체성을 이루는 핵심이었는데. 이전 루트 전면 부정?!
시로와 이리야, 린과 사쿠라 사이에 흐르는 가족애도 이야기의 중요 요소. 사실 린은 알게 모르게 사쿠라를 항상 지켜보며 걱정하고 배려해 주었지만, 정작 사쿠라를 앞에 두고서는 모질게 대해 어긋났다는 점이 안타깝네요. 린의 솔직하지 못한 태도가 사쿠라를 더욱 궁지에 몰기도 했고.
이번 루트에서 맹활약했던 이리야도 귀여워요. ‘구할 수 있는 건 단 하나뿐’이라는 이리야의 말이 현실적이기도 하고 해서 어설프게 만인이 구원받는 안일한 엔딩보다 낫다고 생각하지만, 전 루트에 걸쳐 이리야가 제대로 구원받는 길이 없어서 좀 안타까워요. 그나마 이리야가 살아남는 「Fate」 루트에서도 시한부 인생인 모양이고…
- 기타 주절주절
이 작품은 Fate -> Unlimited Blade Works -> Heaven’s Feel 순으로 루트가 고정되어 있습니다. 루트를 거칠수록 이야기의 규모가 커지네요. 세 루트를 클리어하고 난 뒤 PS2판에서 추가된 라스트 에피소드를 즐길 수 있어요. 그런데 「Heaven’s Feel」 트루엔딩이 진엔딩이라 해놓고 끝에 시로가 세이버와 재회하는 라스트 에피소드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면 이걸 대체 어찌 받아들여야 하는지…;; 인기 없는 사쿠라는 버리고 세이버를 히로인 확정시킨 걸까요?
게임하다 선택지 잘못 타면 데드 엔딩 혹은 배드 엔딩이 참 많아 나오는데, 그 뒤에 타이가와 그 제자 1호 이리야가 어드바이스 해주는 타이가 도장이 나옵니다. 두 사람이 만담 펼치는 모습이 제법 재미있네요. 타이가 스탬프를 모으면 미니 극장과 수료 검정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고보니 수료 검정 편에서 타이가가 ‘오프닝에서 자기가 나오는 장면이 제일 마음에 든다’고 말했지만 PS2판 오프닝에서 타이가는 안 나왔던 거 같은데… 타이거는 오프닝에서 조차 버림 받은 건가요…? 설 자리가 더 줄어든 타이가…;;
게임 내용을 간단히 요약해 보자면, 이상을 앞에 둔 시로의 성장기 정도 되려나요? 캐릭터들이 매력적이고 연출도 좋긴 한데, 문장이 길고 지루해서 플레이하는 동안 괴로웠어요. 솔직히 자동 진행 켜놓고 딴짓도 하고, 글 보다 지쳐서 중간에 졸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 PS2판을 PC로 역이식해 세 루트 나눠서 각각 다운로드 판매한다는 듯합니다. 딱히 PS2판에서 추가된 요소는 없는 모양인데… 그럼 라스트 에피소드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세 루트 다 사서 클리어해야 열린다는 방식을 채택하려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