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야의 조종

베링 해협 댐을 지켜라! 북극해 주변 지역 온난화를 위해 건설된 베링 해협 댐. 총 길이 85km에 이르는 이 ‘현대의 만리장성’을, 소련반체제파 파괴분자로부터 지켜달라고 의뢰받은 프리 용병 코고 세이지는 파트너 네코마타와 함께 조사에 착수한다. 거기에 아내를 잃고 복수심에 불타는 KGB 요원 마리노프가 얽히는데…

다나카 요시키의 처녀 장편 소설입니다. 『은하영웅전설』이 나오기 한 해 전에 나왔다고 하더군요. 첫 발간은 1981년인 모양인데, 제가 읽은 건 2005년 복각판입니다. 복각판 표지의 검은 고양이에 끌려 읽어 보았어요. 이 고양이는 세이지의 동거묘 네코마타인데, 표지 맨 앞을 장식하는 데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맹활약합니다.

이야기의 배경은 이데올로기가 대립하는 냉전 시대입니다. 일반적으로 냉전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 하면, 민주주의 진영에 속한 정의로운 주인공이 공산주의 체제에 속한 악당(주로 소련이나 KGB 등)의 음모에 대항해 평화를 지킨다…는 설정과 전개를 떠올리기 쉽지요. 하지만 역시 작가의 성향이 성향이니만큼, 이 작품은 다릅니다. 흑백논리로 선과 악을 가르지 않지요.

이야기의 핵심이 되는 베링 해협 댐은 인공적으로 난류를 흘려보내 북극해의 수온과 주변 지역의 기온을 올리고 부동해를 만든다는 계획에 따라 진행된 대규모 프로젝트입니다. 거대한 댐을 만드는 데 미국을 비롯해 캐나다 등 민주주의 진영도 함께 참여했지요. 혹독한 추위에 시달리는 러시아인에게는 희망의 등불이자, 미소 양 진영이 함께 손잡고 추진하는 화해와 평화의 상징인 셈이지요. 그런데 베링 해협 댐을 노리는 무리가 있었으니, 그들은 소련의 소수민족 차별에 대항하는 테러리스트 조직 ‘백러시아 해방동맹’입니다.

프리 용병인 코고 세이지는 과거에 자신이 몸담았던 용병조직 ‘화이트 크루세이더’의 우두머리 사이먼 올소프의 중개로 기상학자 샤로우 박사와 그 제자 클라리스를 만나게 됩니다. 샤로우 박사는 러시아 소수민족 해방운동에 앞장선 운동가로 현재는 유럽에 망명한 상태입니다. 망명 후 ‘백러시아 해방동맹’을 지원했지만 현재는 연결고리와 영향력이 약해진 상태인데 ‘백러시아 해방동맹’의 베링 해협 댐 테러 계획을 알게 된 후 이를 막아 달라고 올소프에게 의뢰한 것이지요.

또 하나의 주역인 KGB 요원 우라디미르 마리노프는 소련의 어두운 현실을 파악하면서도 가정과 직무에 충실한 인물입니다. ‘백러시아 해방동맹’의 핵심인물 코랴의 손에 마리노프의 아내가 죽고 아들은 크게 다쳐 의식불명 상태에 빠지지요. 마리노프는 분노와 복수심에 휩싸여 코랴의 행적을 쫓는 와중 ‘백러시아 해방동맹’의 베링 해협 댐 테러에 다가가게 되는데… 서장에서 마리노바 부인이 남편 직업을 밝힌 게 오히려 명을 재촉했다는 사실이 안타깝더군요. 마리노바 부인은 아들을 살려야겠다는 모성애로 있는 힘을 쥐어 짜내 호소했지만 오히려 역효과였으니…

4장까지 홀수 장은 코고, 짝수 장은 마리노프 시점에서 진행되다가, 5장에서 코랴의 정체가 드러나고, 6장 끝에서 코고와 마리노프가 합류합니다. 두 사람이 협력 체제로 돌입하는 건 8장서부터…  베링 해협 댐 폭파를 막고자 동분서주하는 코고와 클라리스와 마리노프는 그 안에 감춰진 여러 집단의 이해타산과 음모와 진실을 알게 되는데…

이제 와서 냉전 시대 배경의 소설하면 좀 낡은 감이 없잖아 있을 듯한데, 단순히 이데올로기와 사상 차이로 선악 구별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제법 참신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사실 요즘에도 이런 시각의 작품은 비교적 드물지 않나 싶은데 그 시절에는 오죽했겠어요. 최근에는 냉전 체제가 무너지고 색안경도 많이 옅어지긴 했지만 여전히 흑백논리에 사로잡힌 사람도 있고…

그나저나 이야기 중후반에 세이지가 진지하게 혈액형 강좌를 하는 장면이나 이 설명을 듣고서야 상황을 이해하는 클라리스의 모습을 보고 뜨악했습니다. 클라리스, 너 대학 과정을 밟는 재원이라며…? 어째서 그런 걸 모르는 거냐…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만, 이 소설이 나온 80년대 초반에는 혈액형 상식이 널리퍼지지 않아서 그렇겠거니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알고 보면 ABO식 혈액형 구별도 정확한 건 아니라고 하는데,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