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트 노벨 평론가로 유명한 크로이츠가 쓴 소설로 화제가 된 작품입니다. 작가 본인은 평론가로서의 입장을 접고 새로운 필명으로 소설가의 길을 걸어나갈 생각인 모양인데, 주변에서는 좋은 평론가가 사라졌다고 아쉬워하는 목소리가 꽤 되는 듯하네요.
작가가 평론가로서의 네임밸류가 있다고는 해도 전 딱히 이 소설에 큰 기대를 품고 읽은 건 아니기 때문에 기대치로 인한 실망이나 감탄 같은 건 없었습니다. 그다지 추켜세울 생각도 없고, 눈에 핏대 세우며 깔 생각도 없으니 간단히 주관적인 감상이나 끄적끄적.
몰락한 기숙사제 여학원을 배경으로 800년만에 부활한 마왕과 슬럼프에 빠진 천재소녀작가의 보이 미츠 걸 스토리. 대체적인 세계관 및 구성은 다 어디선가 본 적 있는 것들…. 좋게 말하면 친숙하고, 나쁘게 말하면 흔한 설정이네요. 이런 보편적인 소재를 얼마나 감칠맛나게 요리하느냐가 관건인데… 솔직히 말해 이 작품은 살짝 미묘한 느낌입니다.
주인공인 마왕 가인의 외양이라든가 성격 등 캐릭터성이 모 애니메이션 주인공이랑 겹쳐지는 부분이 많아 읽으면서 살짝 떨떠름한 느낌에 더해 의미없이 혼잣말을 주절거리는 연출은 영 안 좋아해서 초반에는 시큰둥한 마음으로 읽었는데(초반에 부활한 가인의 원맨쇼는 무지무지무지 오글거렸음…;;), 중후반에는 재미가 붙더군요.
등장 캐릭터는 각 유형별로 착착 준비해 배치해 놓았지만, 캐릭터의 매력을 충분히 살리지는 못한 것 같아요. 조연뿐만이 아니라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두 주인공 캐릭터의 깊이가 부족한 것 역시 문제인 듯. 각 캐릭터가 자신의 입을 통해 무거운 과거를 밝히지만, 이게 확 와닿질 않네요. 마치 주어진 대본을 감정없이 읽고 있는 배우를 바라보는 관객의 심정이랄까… 그저 주어진 사실을 나열할 뿐이라, 머리로는 상황을 이해하겠는데 감성이 안 따라간다…;; 절박함이 부족해…
후반부가 흥미진진하긴 했는데 특정 작품을 연상시키는 문체랑 분위기 때문에 아류작을 보고 있다는 느낌이 무럭무럭 피어오르더군요. 마법명이란 소재가 처음 나왔을 때는 좀 익숙한 느낌이 들어도 그 정도 쯤은 허용범위내였는데, 가인이 소녀를 구원하겠다고 결심하며 마왕명을 외치는 장면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기시감… 소녀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내던진다는 건 흔하다면 흔한 소재고, 뻔하다면 뻔한 전개이긴 한데 일부분이긴해도 이렇게나 타작품과 판박이스러운 느낌을 준다면 감점이 가해지는 건 피할 수 없을 듯… 이건 저만 그렇게 느끼는 걸까요…?
그외에 문장이 한글로써는 좀 어색해보이는 부분이 꽤 눈에 들어옵니다. 쉼표 사용도 좀 잦고… 이것은 외국어 노출의 폐해?! 뭐, 저도 무의식중에 어색한 문장이나 표현을 써대니 남말 할 처지는 아닙니다만… 문체가 엉망인 건 아닌데 매끄럽다고는 못하겠어요.
이야기의 포인트인 마왕과 소녀의 만남과 교류, 그리고 그로 인한 변화…라는 측면에서는 제법 마음에 드네요. 닮은 꼴인 에리스와 가인이 만나 서로를 이해하고,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그간 갇혀 있던 단단한 틀을 벗어나 함께 미래로 나아가게 된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가인이 스스로를 단절하고 홀로 틀어박힌 에리스를 설득해 다시 세상으로 끌고 나온 부분이 꽤 마음에 들었어요. 이거라면 반드시 먹힌다!… 라며 가인이 자뻑스러운 생각을 해대는 건 살짝 닭살스러웠지만… 보이 미츠 걸 혹은 성장물로써는 나쁘지 않은 작품이 아닌가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