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익의 유스티아

하늘이 붉게 물들던 그날, 부유도시 노바스 아이텔의 일부가 무너져 내려 수많은 사람이 생을 달리합니다. 그 비극적인 사건 ‘그랑 포르테(대붕락)’ 때 가족을 잃고 시궁창 같은 최하층 ‘감옥’으로 흘러들어온 카임은 암살자로서 손에 피를 묻히며 처절하게 살아남습니다. 이제는 암살업에서 손을 떼고 그 외 무엇이든 의뢰받은 일을 처리하며 살아가는 카임은, 실질적으로 ‘감옥’을 지배하는 조직 ‘불식금쇄’의 우두머리 지크에게 의뢰를 받아 뒷골목으로 향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10여 년전 그랑 포르테 때 목격했던 ‘트라제디아(종말의 노을)’와 똑같은 붉은 빛을 내뿜는 소녀 유스티아를 만나게 되는데…

 

18금 남성향 게임 브랜드 오거스트에서 내놓은 게임입니다. 중세풍 판타지 세계관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에요. 주인공 카임과 유스티아를 중심으로 노바스 아이텔에서 살아가는 그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카임의 주변환경도 그렇고, 노바스 아이텔 전체적인 상황도 썩 좋은 편이 아니라 다소 어둡고 진지한 분위기를 풍깁니다.

이야기는 일직선 구조로 피오네->에리스->성녀 이레느 & 라비리아->리시아->유스티아 편 순으로 이어지고 각 히로인 이야기에서 히로인과 맺어지면 그대로 엔딩, 히로인과 엮이지 않으면 이야기의 다음 흐름으로 넘어갑니다. ‘감옥’의 실태, 방역국의 날개 사냥과 연구소에 대한 의혹, 성녀의 진실과 부유도시의 수수께끼, 그랑 포르테의 원인, 멸망해가는 노바스 아이텔의 위기를 앞에 둔 이상과 현실의 충돌… 카임의 주변 상황부터 시작해 이야기 규모가 점차 확대됩니다.

주인공 카임은 노바스 아이텔 하층에서 어머니와 형과 함께 사는 평범한 소년이었지만, 도시 일부가 무너져 내린 그랑 포르테 때 가족을 잃고 ‘감옥’으로 흘러들어 갑니다. ‘감옥’은 그랑 포르테의 여파로 생긴 무법지대로, 정식명칭은 특별피해지구입니다. 지금은 ‘불식금쇄’의 통제 아래 다소 질서가 잡힌 상태이긴 하지만, 아직도 ‘감옥’의 상황은 피폐하고 처참하지요.

‘감옥’을 살아가는 카임과 주변 사람들에게 안식과 일상의 상징인 주점 비놀레타. 이곳을 지키는 여주인 멜트는 주변 사람들을 감싸 안는 통 큰 여자입니다. 제법 영악한 면모도 있고… 초반에 카임과 지크가 형제라는 둥 얘기가 나와서 얘네들 의형제라도 맺었나 싶었는데 이거 불건전한 의미였군요. 어느 쪽이 형이냐 묻는 지크의 물음에 의미심장하게 웃어넘기는 멜트는 팜므 파탈!

그랑 포르테 이후 사람들의 등에 날개가 돋는 우화병(羽化病)이 창궐하는데, 우화병이 발병한 이들을 ‘날개돋이’라 칭합니다. 이러한 ‘날개돋이’를 보호해서 치료원으로 이송하는 집단이 바로 ‘날개사냥꾼’이지요. 정식명칭은 방역국이긴 하지만, 일반인들 사이에 그다지 인식이 좋지 않아 정식명칭으로 불리는 일은 거의 없는 모양입니다. 티아도 ‘날개돋이’가 된 터라 ‘날개사냥꾼’만 보면 끌려갈까봐 안절부절 못하지요. 티아를 보호중인 카임도 사실을 숨기려 필사적이고.

피오네는 방역국에서 ‘감옥’을 담당한 부대의 대장입니다. 그녀는 대단히 성실한 성격에 임무에 대한 사명감이 투철해서, 어떡해서든 충실히 임무를 수행하며 방역국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려 노력하지요. 그리고 임무 수행을 위해 ‘감옥’ 사정에 밝은 ‘금식불쇄’와 협력하게 되는데, 이때 카임이 그 대표로서 피오네와 함께 합니다. 피오네가 워낙 고지식한 성격이라 카임과 의견 대립도 종종 벌어지지만, 점차 현실을 알고 사고방식이 유연해지는 게 눈에 보이더군요. 그러나 훗날 피오네가 알게 되는 날개사냥과 치료원의 진실은 무척이나 가혹한 것이었으니…

처음 피오네 엔딩 봤을 땐 뭐하나 제대로 해결되는 것 없이 카임과 맺어지며 끝나서 이게 뭔가 했어요. 이렇게 찜찜하게 끝나도 되는 건가 싶어서… 게다가 얘네 둘이 언제 이런 연애 감정을 쌓았대요? 피오네는 몰라도 카임이 갑자기 피오네가 좋다 그러는 건 정말 뜬금없는 느낌이라. 카임이랑 맺어지지 않고 메인 스토리를 타는 것이 피오네가 성장하여 바로 서는 길 같아요. 이건 피오네 뿐만 아니라 다른 히로인도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이야기예요.

‘감옥’에서 의사 일을 하며 사는 지독한 독설가 에리스. 그녀는 세상만사에 전혀 관심이 없지만, 단 한 사람 자신을 창관에서 빼내어준 카임을 무척이나 사랑하며 집착합니다. 카임은 그저 에리스가 어엿한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훌륭하게 독립해서 살아가길 바랄 뿐이지요. 이는 카임의 어린 시절 트라우마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문제예요. 카임과 에리스의 갈등이 소용돌이치는 와중, ‘감옥’에서 세력을 양분하는 집단 ‘금식불쇄’와 ‘풍창’의 대립이 펼쳐집니다.

카임 바로 곁에서 카임의 애정을 갈구하지만 전혀 보답받지 못하는 에리스가 안쓰러운 한편, 에리스의 마음을 받아주지 못하는 카임의 심정이 이해가 갔어요. 카임과 에리스 두 사람 모두를 위해서라도 어설프게 엮이는 건 좋지 않은 상황이었고… 카임의 확고한 거절로 일방적인 매달림에 종지부를 찍고 대등한 존재로서 스스로 일어서게 된 에리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이야기는 ‘감옥’ 문제를 일단락 짓고 성녀 이레느와 노바스 아이텔의 숨겨진 비밀로 이어집니다. 먼 옛날, 신과 그 사자인 천사의 은총 아래 번영을 누리던 인간이 감사의 기도를 잊자 이에 분노한 신은 천사를 천상에 불러들입니다. 천사를 잃은 이후 대지는 탁류에 휩싸이고 인류가 멸망을 눈앞에 둔 와중에 초대 성녀 이레느는 신께 필사적으로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올리고, 신은 그 기도를 받아들여 성녀와 그녀를 믿는 신자를 용서하고 도시를 천공에 띄워 인간을 구원합니다. 이것이 바로  대대로 성녀의 기도에 의해 지탱하는 부유도시 노바스 아이텔의 기원입니다.

그리고 그 전설로부터 약 500년이 흐른 현재, 노바스 아이텔을 지탱하는 이는 바로 제29대 성녀 이레느입니다. 그랑 포르테를 일으킨 책임을 지고 처형 당한 선대 성녀 이레느의 그 뒤를 이어받았지요. 하여간 꿈속에서 천사의 계시를 들었다는 현 성녀 이레느는 천사의 아이인 유스티아를 보호하겠다며 성역으로 불러들이고, 카임도 티아의 보호자 자격으로 성역에 따라갑니다.

오로지 종교에 대한 신념에 모든 가치를 두는 성녀 이레느와 성녀를 깊이 존경하고 충실히 섬기지만 신관장의 압박에 몸 둘 바를 모르는 신관 라비리아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화해, 깊은 유대를 중심으로 종교의 허구와 진실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잠꼬대 같았던 이레느의 꿈도 사실 이야기의 핵심과 깊게 맞닿아 있었고. 성녀 계승은 교회 측에서 해마다 신관중에서 성녀 후보를 선발해 놓고, 당대의 성녀 이레느에게 만일의 경우가 생기면 이를 성녀 후보에게 잇게하는 식으로 운영됩니다. 성녀의 신성성과 기적을 생각해보자면 어째 썰렁한 계승 방식인데… 사실 성녀는 누가 되더라도 상관 없는, 그저 상징적인 존재였을 뿐이니 큰 의미가 없는 일이긴 하죠.

성녀의 허상을 깨닫고 다시 찾아온 ‘감옥’의 붕괴 때문에 소중한 존재를 잃은 후, 진실을 찾기 위해 상층으로 올라간 카임. 방역국과의 협력 때부터 쭉 인연을 맺은 개혁파 고위귀족 루키우스와 거래해 루키우스의 보좌관 자격으로 왕궁에 출입하게 됩니다. 이야기는 왕궁으로 무대를 옮겨 노바스 아이텔의 정치체제와 상층부의 비밀을 중심으로 전개되지요.

우연한 만남으로 왕녀 리시아의 호감을 얻게 된 카임은 집정공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는 리시아에게 현실을 일깨워줍니다. 하지만 집정공에게 유리하게 굳어진 판도를 뒤엎기는 쉽지 않은 일. 결국 리시아는 집정공을 몰아내기 위한 루키우스의 무력봉기에 협력하기로 하지요. 그 와중에 집정공의 수상한 연구와 10여 년 전 그랑 포르테가 일어난 원인이 드러나는데…

그나저나 리시아 편에서 카임과 루키우스의 관계가 명확히 드러나네요. 루키우스는 초반부터 카임에게 의미심장한 태도를 보이는데다, 묘하게 신경을 많이 쓰고 배려해줘서 그 정체는 이미 예상했습니다만… 카임도 루키우스에게 기묘한 느낌을 많이 받기도 했지요. 처음에는 진실을 알고 루키우스에게 반발하지만, 결국 루키우스에게 달려가 협력하는 카임의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리시아 엔딩으로 빠지면 두 형제는 서로 척지는 일 없이 사이좋게 잘 먹고 잘 살듯해요.

그런데 집정공 아저씨의 만행이 노바스 아이텔의 멸망을 앞당기는 방아쇠가 되었는데… 리시아 엔딩 타면 천사의 힘 폭주 이벤트가 안 일어나 멸망까지의 유예기간이 길어진 듯합니다. 리시아 후일담에 몇 년 후까지 언급된 걸 보면, 적어도 몇 년 이상 말이죠. 그래도 멸망을 회피할 수 있는 건 아니겠습니다만… 그랑 포르테가 안 일어났다면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었을지 궁금하네요.

마지막으로 모든 진상이 드러나는 유스티아 편이 압권입니다. 앞서 펼쳐진 모든 이야기가 한데 묶여 유스티아 편에서 터지는데, 극한 상황에서 제각각 자신의 신념을 관철하며 대립하고 충돌하는 모습이 참… 단순히 선악으로 나눌 수도 없고, 명확한 정답이 나오는 문제가 아니라 답답하기 그지없습니다. 방황하는 카임의 마음이 이해 안 가는 것도 아니고… 그 와중에 카임과 인연을 맺어 시련을 거치고 성장한 이들이 스스로 일어서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도 인상적이었어요.

그리고 카임과 친형 루키우스와의 결말도 볼거리입니다. 카임이 내내 어린 시절 아임을 별로 안 좋아했다는 둥, 루키우스가 정체를 밝히고 나서도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둥 뚱한 태도를 취했지만 카임의 마음속에서 가장 큰 자리를 차지했던 게 아임이라는 사실은 누가 봐도 뻔하죠. 무력봉기 사건을 통해 그간의 골을 메우고 형제의 유대를 되찾은 건 좋았지만, 유스티아 편에 들어서면서 카임이 루키우스에게 휘둘리는 모습을 보입니다. 예전이라면 ‘감옥’의 일원으로서 모든 것을 보고 생각하고 행동했겠지만… 상층에 올라와 모든 진실을 알게 된 후, 잔혹한 현실과 루키우스의 굳건한 이상 앞에 갈피를 못 잡게 된 카임의 고뇌가 절절합니다.

오랜 고뇌 끝에 카임은 자신의 진정한 바람을 깨닫고 루키우스와 대립하게 됩니다. 어린 시절의 우상, 인생 전체를 옳아맨 주박, 한때 같은 목표를 향해 달리던 형 루키우스와의 결별과 대립은 카임이 과거를 떨쳐버리고 성장하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겠죠. 카임은 아임이란 족쇄를 끊어내지 않는 한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고. 카임과 루키우스가 때때로 은연중에 상대를 향한 애정을 드러내는 모습이 좋았습니다. 서로 어긋나긴 했지만 두 사람의 우애는 깊었다고 생각해요.

유스티아는 모든 것의 시작이자 끝. 티아와의 만남이 카임의 인생과 노바스 아이텔의 미래를 크게 바꿔 놓았습니다. 평생을 불행하게 살았지만 카임과 만나서 작은 행복을 얻고, 카임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희생한 티아를 보고 있자니 짠해요. 이 아이에게 허락된 평범한 행복이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워요. 카임이 은근히 우직한 성격인데, 홀로 티아를 그리며 솔로 인생 걷는 걸까요?

그런데 이거, 유스티아 루트 안 타면 노바스 아이텔은 멸망 확정이잖아요…! 그저 시기가 늦느냐 빠르냐의 차이일 뿐 유스티아가 각성하면 인류 전멸…;; 제아무리 카임이 딴 히로인하고 맺어져 행복해져 봤자 그다지 희망이 없습니다. 사실 히로인 엔딩보면 무언가 뒤끝이 남는 찜찜함 때문에 썩 기분이 개운치 않긴 하지요. 그저 유스티아의 희생만이 유일한 구원이란 말인가…

 

이 게임의 주제는 과거의 그림자에 얽매인 이들이 살아가는 의미를 찾는 이야기. 카임이 아닌 척해도 의외로 정 깊고 남 잘 챙겨주고 오지랖 넓은 성격이네요. 그 덕분에 알게 모르게 여러 사람 구원하고 그로 인해 인류가 희망을 얻을 수 있었죠. 그 대신 정작 카임은 소중한 존재를 잃었지만… 언제나 티아가 카임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위안 삼아야 할까요? 두 사람이 평범한 행복을 손에 넣었으면 했는데. 그저 이번에는 윗선에서 진실 은폐와 사실 왜곡을 하지 않길 바랍니다. 하다못해 사람들이  티아의 희생 아래 구원이 있었다는 사실이라도 알아야 하지 않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