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구의 벚꽃

해마다 마을에 만개하는 ‘유구의 벚꽃’. 여고생 나루미는 그 벚나무 부근에 유령이 나타난다는 소문을 들은 친구 유카의 꼬임에 넘어가, 밤중에 유구의 벚꽃 근처로 벚꽃놀이를 가게 됩니다. 그리고 나루미는 유구의 벚꽃 아래에서 ‘나토라의 연회’를 위해 모인 오우키와 오우카, 나토라의 구슬을 계승한 자들을 만나게 되지요. 나루미는 그 자리에서 요시쿠니가 일으킨 나토라의 구슬 강탈 소동에 휘말려 시간을 넘나들게 되는데…

 

반테안 시스템즈에서 개발하고 오토메이트에서 발매한 PS2용 여성향 연애 어드벤처 게임입니다. 초반 전개가 어수선해서 지뢰작인가 의심했는데, 이게 의외로 재미있었어요. 회차를 거듭할수록 이야기의 핵심이 드러나는 구조인지라 올클리어를 하지 않으면 진가를 발휘하지 못 할 듯. 저만 해도 1회차만 플레이했더라면 게임 평가치가 현저히 낮았을 것 같습니다.

기본적으로 시대별로 나루미를 사이에 두고 남성 캐릭터끼리 삼각관계―때로는 조연이 가세해서 +α가 될 때도 있고―를 형성한다는 것이 특징. 한 쪽을 선택하면 다른 한쪽은 차버려야 하는 상황이 되는데 공략 캐릭터들이 다들 나루미에게 절절하게 매달리는 걸 보면 버려지는 쪽이 좀 불쌍해집니다. 아무래도 인정상 어느 한 쪽을 매몰차게 외면하기가 힘들기 때문에 선택에 따라 나루미가 갈대처럼 우왕좌왕하는 상황이 펼쳐질 수도 있어요.

 

  • 다이쇼 시대 : 히노 스구루 & 요코이 시로

다이쇼 시대에서 함께 하게 되는 인물은 나루미의 클래스메이트 히노 스구루와 다이쇼 시대의 군인 요코이 시로. 동급생인 스구루는 예전부터 나루미를 짝사랑해 왔는데, 나루미가 그쪽 방면으로 영 둔한데다 본인도 밀어붙이기가 약한 성격이라 늘 애만 태우는 중입니다. 시로는 한밤중에 거리를 돌아다니는 나루미를 수상쩍게 여겨 이래저래 추궁하는 완고한 군인이고요.

스구루는 오래전부터 나루미를 짝사랑해 온 순정파이긴 한데, 캐릭터 자체도 그리 취향이 아니지만 상대가 좀 안 좋았던 것 같네요. 시로를 상대하기엔 여러모로 부족한 느낌. 플레이하는 도중 언제나 제 마음속의 천칭은 시로쪽으로 기울어져서, 스구루 루트 플레이 하는데 좀 애먹었습니다. 시로가 나루미에게 담담히 이별을 고하는 게 너무 짠해요. 나루미를 잃은 뒤 90여 년을 고독 속에 살아온 현대의 시로도 불쌍합니다. 마지막에 현대의 시로가 모든 걸 받아들이고 쓸쓸하고도 묵묵하게 최후를 맞이하는 게 안쓰럽기도 하고… 어쩐지 시로는 심금을 울리는 데가 있음.

그외에… 시로의 절친한 친구인 류노스케는 정말 좋은 사람입니다. 나루미와 시로가 맺어지는데 앞장선 일등공신이랄까… 이런 친구 두고 있는 걸로도 시로는 충분히 성공한 인생인 것 같네요. 스구루 엔딩에서는 류노스케가 군에 입대한 스구루도 잘 챙겨주는 모양이고. 류노스케에 대해 언급한 시로의 보이스레코더 내용이 찡했어요. 예전에 키우던 고양이랑 닮은 녀석을 만나 류노스케라 이름을 지어줬더니 박정하게 그냥 가버리는 게 그 녀석을 닮았다고…

다른 시대 공략 캐릭터들은 게임 진행 중 적에게 조종당하거나 제정신이 아니거나…등의 이유로 나루미와 대치하게 되는데, 다이쇼 팀 공략 캐릭터들은 다른 시대 팀과는 달리 나루미와 전투를 벌이는 일이 없어서 좋더군요.

  • 무로마치 시대 : 카미노무라 소마 & 아시카와 요시쿠니

무로마치 시대에서 활약하는 인물은 나루미의 동급생인 소마와 나토라의 구슬을 노리는 악당(?) 요시쿠니. 요시쿠니는 무로마치 시대 사람이니만큼 소마랑 나루미는 적의 본거지에 떨어진 격… 이라 할 수 있겠지요.

소마는 나루미와 함께 교내에서 1,2위를 다투는 수재입니다. 그간 나루미와 안면이 없었지만, 성적 발표할 때마다 항상 나란히 이름이 게시되곤 해서 서로의 존재만은 알고 있었지요. 도서관에서 우연히 통성명한 후 교류를 갖게 됩니다. 소마는 음양술사 집안인 카미노무라 가의 당주로, 병약한 남동생 유우리를 끔찍이도 아낍니다. 그간 자신이 지닌 나토라의 힘으로 유우리의 발작을 억제해 왔기 때문에 나토라의 힘을 포기하는 것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지요.

소마는 유우리와 꼭 닮은 자신의 조상 신겐과 삼각관계에 빠지기도 하고, 흐름이 바뀐 현대에서는 존재 자체가 사라지기도 하는 등 여러모로 고생합니다. 소마의 존재가 사라진 현대에서는 소마 동생인 유리와 나루미가 약혼한 사이로 등장하기도 하는데 이 상황도 조금 흥미진진 했어요.

요시쿠니는 나토라의 연회에 나타나 보옥을 강탈한 장본인으로 다른 루트마다 나루미 앞을 가로막는 인물입니다. 처음에는 보옥을 훔쳐간 요시쿠니의 음모와 그에 대항하는 일행들의 이야기가 모든 것의 핵심으로 이어질 것이라 생각했는데, 페이크였네요. 뭔가 거창한 음모를 꾸미나 싶더니, 결국 요시쿠니도 결국 코토코에게 속아 이용당한 것뿐이었고. 요시쿠니 루트를 마지막에 플레이해야 하나 고민했는데, 그럴 필요 없음. 그나저나 요시쿠니 엔딩은 유일한 새드엔딩이네요. 요시쿠니 엔딩 뒤로 하야토 루트가 이어지긴 하지만, 둘은 어디까지나 별개의 인물이니…

  • 에도 시대 : 미즈키 유이 & 시키모리 아키토

에도 시대에서 떨어진 인물은 유이와 아키토. 유이는 나루미의 남동생인 하야토의 친구로, 여자애로 착각할 만큼 예쁘장한 외모를 지닌 소년이고, 아키토는 종합병원 의사로 겉보기엔 가벼워 보이지만 자신이 지닌 비밀 때문에 타인과 선을 긋고 적당히 거리를 두는 인물입니다.

에도시대의 남정네들은 둘 다 변신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공통점. 처음 오프닝 동영상에서 성인 모습의 유이를 봤을 때, 시간이동물인 만큼 나루미와 시간이 엇갈려서 성인모습으로 등장하나 했는데… 원래부터 유이는 성인으로 변신하는 능력이 있다고 나왔을 땐 좀 벙쪘습니다. 두 남정네 모두 첫 등장시와는 다른 모습으로 엔딩을 맞이한다는 것 역시 공통점이려나요.

다른 시대와는 달리 삼각관계의 밀도가 낮았던 것 같아요. 다른 남정네들은 나루미가 다른 사람을 선택해도 여전히 나루미를 마음에 두고 도와주려 애쓰는데, 에도 시대 팀은 차이고 나면 미련 끊고 돌아선다는 느낌이랄까… 특히 아키토는 얄짤 없음. 호감도가 0으로 팍 떨어지는 거 보고 할 말을 잃었습니다. 유이는 아키토 정도는 아니지만, 채인 이후 꽁해서 외면해 버리는 느낌…;;

  • 현대 : 도키자와 하야토 / 진상편 : 호죠 타다토키

요시쿠니와 시로 엔딩을 보면 들어갈 수 있는 하야토 루트와 스트랩 전12종을 모으면 들어갈 수 있는 타다토키 루트. 타다토키 루트는… 중간에 스트랩 하나를 놓쳐서 나중에 그거 찾느라 삽질 했습니다. 아이템은 그때 그때 샅샅히 뒤져서 제대로 챙겨 놓는 게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네요.

하야토 루트는 요시쿠니 엔딩의 연장선상의 이야기입니다. 얼굴이 바뀌었어도 하야토는 나루미와 의심할 여지없는 친남매 관계인지라… 이쪽 소재가 거북하신 분은 불편할지도 모르겠네요. 사실 전 이 루트에서 하야토보다는 시로 쪽이 더 신경쓰였어요. 시로가 생을 마감할 땐 그저… 시로의 결말 때문에 하야토 루트는 그다지 정이 안가요. 현대의 시로가 제대로 행복을 붙잡을 수 있는 길은 정녕 없는 것일까요. 그 선택이 시로답긴 하지만, 역시나 불쌍해서…

타다토키 루트는 보옥과 보옥의 주인 타다토키에 대한 이야기가 밝혀지는 진상편. 타다토키는 시공을 넘나드는 것은 기본이요, 시공의 일그러짐을 바로 잡을 수 있고, 타인의 기억을 마음대로 조작할 수도 있고, 미래를 예지하며, 자기 뜻대로 주거공간을 만들어낼 수 있고, 다른 인물에게 불로불사와 초능력을 부여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죽은 사람도 살려내는 킹왕짱 센 음양술사입니다. 당대에 그와 견줄 수 있는 능력자는 숙적인 후사코 히메뿐이었던 것 같아요.

게임을 진행하다보면 오우카와 오우키가 은근히 나루미에게 친밀한 태도를 취하는 모습이나, 타다토키가 나루미에게 상당히 애착을 보이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여기에서 그 이유가 드러나네요. 나토라의 구슬에 뭔가 대단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줄 알았더니, 첫사랑을 향한 타다토키의 집념…이었을 뿐. 어쩌다 휘말린 것 처럼 보였던 나루미가 사실 모든 일의 근원이었어요.

호감도 낮을 때의 엔딩에서는 연회를 무사히 치르고 부활한 타다토키와 기억을 가진 나루미가 맺어집니다만, 호감도 50 이상 엔딩에서는 본편 흐름과 연결되어 타다토키가 아무 것도 모르는 나루미를 곁에서 지켜보는 것으로 끝을 맺네요. 후자쪽이 진엔딩이라는 느낌.

첩실이었던 어머니는 아버지의 사주에 의해 죽고, 어머니를 죽인 철천지 원수인 후사코는 망령이 되어서까지 따라 붙어 자신의 부활을 방해하려한 것도 모자라 때에 따라서는 사랑하는 이를 죽게 만들기도 하고, 기껏 술법을 써서 간신히 재회하게 된 사랑하는 여자는 아무 것도 모른 채 다른 사람과 맺어져 버리기까지… 어째 타다토키는 지지리도 여복이 없는 것 같네요…;

취향타는 게임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재미있게 즐긴 작품입니다. 사격―나중엔 좀 번거롭게 느껴지지만…―이나 맵이동, 아이템 수집 등의 요소를 넣은 것도 마음에 들었고… 단순 선택지 게임보다는 어느 정도 게임성이 있는 물건이 좋거든요. 근데 왜 사격 파트랑 플로 차트에서는 아날로그 스틱 밖에 안먹는 건가요…;; 그다지 험하게 쓰지 않은 듀얼쇼크2가 고장나서(더 오랫동안 막굴린 듀얼쇼크도 멀쩡한데 어째서!?) 하릴없이 듀얼쇼크로 플레이하는데, 아날로그 스틱이 헐거워져서 조작에 애먹었습니다. 일반 십자키로도 조작할 수 있게 해줄 것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