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c Tac Toe

때는 19세기 말, 런던 교외에 있는 윌프레드 남작가. 젊은 당주 알버트 W. 윌프레드 남작의 생일을 맞이하여 하나 둘 모이는 손님들. 하지만 연회를 앞두고 갑작스럽게 내린 폭설로 저택은 고립된다. 이 와중에 저택에서 참혹한 사건이 차례차례 일어나고, 주인공 알버트는 불가사의한 현상을 경험하는데…

 

Team TTT에서 만든 국산 동인 게임 『Tic Tac Toe』입니다. 『Tic Tac Toe』는 19세기 당시 세계에서 가장 번영했던 국가인 영국 빅토리안 시대를 배경으로 한 고딕 미스테리 비주얼 노벨입니다. 선택지에 따라 22개의 멀티 엔딩을 맞이할 수 있으며, 엔딩을 보기 위해서는 특정한 조건을 필요로 할 때도 있습니다. 제목의 ‘TicTacToe’는 실존하는 게임의 명칭에서 파생한 것. 파편처럼 흩어진 이야기의 진상을 전부 파악하기 위해서는 모든 루트를 따라가며 각 엔딩을 하나하나 모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상, 공식 홈페이지 게임 소개에서 따왔습니다.

이야기는 주인공 알버트의 생일 연회를 앞두고 벌어지는 참극을 다루고 있습니다. 생일 나흘 전부터 사흘 동안 끊임없이 반복하는 죽음과 회귀의 굴레를 벗어나 무사히 생일을 맞이하는 것이 목표이지요. 사흘간을 반복하며 진실에 다가서는 루프물. 폭설로 고립된 저택과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의문의 살인사건 등의 요소를 보면 클로즈드 서클물이라고 봐도 될 듯?

주요 등장인물은 윌프리드 남작가의 당주 알버트, 알버트의 주치의이자 절친한 친구 라이오넬, 알버트가 양자로 들인 쌍둥이 남매 앨리스와 루이스, 쌍둥이를 돌보는 가정교사 패트리시아, 알버트의 약혼녀 후보 스텔라, 스텔라의 삼촌 에그먼드, 알버트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친분을 쌓은 그레이 백작, 보석상 사업을 하는 미망인 비비안, 윌프리드가의 집사 알프레드, 저택의 메이드 세라와 니나와 코렛트, 늙은 사냥개 시저 등입니다.

처음에는 이야기의 개요를 보여주는 The Fool 루트를 밟은 뒤, 다음부터 선택지에 따라 진행이 바뀝니다. 플레이하다 보면 선택지에 따라 주인공의 태도가 달라지고 등장인물이 바뀌며 이야기가 조금씩 어긋나는 과정에서 기묘한 위화감이 느껴지는데…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이를 토대로 중반에 게임의 트릭을 눈치챌 수도 있겠네요. 물론 진상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루트 차례로 거치면서 마지막까지 달려야겠지만… 어쨌거나 루트마다 던지는 복선과 떡밥이 얼기 설기 엮이는 이야기가 짜임새 있어요. 진행하면 진행할수록 드러나는 진실과 늘어가는 의문이 어우러지다가 아귀가 맞는 모양새가 인상적입니다. 비슷한 느낌의 작품을 꼽자면 이것이것.

처음에는 인식 못 하겠지만 The Fool 루트를 돌아보면 뒤죽박죽이라는 느낌이 들 텐데… 이건 다 비슷한 상황에서 몇 번이고 루프를 반복한 알버트의 기억과 인식이 뒤섞였기 때문이겠죠. 처음에는 이를 토대로 이야기를 판단하려 드니 트릭에 걸리고 마는 거고요.

알로이스를 사이에 둔 라이오넬과 비비안의 치정극에 대해 주절주절. 알로이스는 라이오넬의 약혼자와 엮였던 자신의 배신 때문에 상처입고 원망하고 있다고 상심하고 있었지만, 사실 라이오넬에게 비비안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라이오넬에게 소중한 사람은 알로이스였고, 그런 알로이스를 꾀어낸 비비안의 가증스러움에 분노하고 치를 떨었을 뿐… 처음부터 비비안의 본색을 알았지만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았는데, 그런 식으로 알로이스를 채가려 했으니 분통 터질 수밖에…;; 알로이스와 거리가 멀어진 것은 알로이스가 자신의 본심을 모른 채 거리를 두었기 때문일 테고… 마지막엔 끝까지 자신을 믿어주지 않는 알로이스의 태도에 애증이 폭발해서 결국….

라이오넬의 행적을 보면 그저 눈물 나네요. 가장 원하던 것을 손에 넣지 못하고 타의로 그 기회마저 잃은 채 메말라 버린 그 모습이…;; 몇 년만에 간신히 알로이스가 먼저 손 내밀었을 때 환희에 차 있었을 텐데 음모에 휘말려 절망에 빠지고 결국 소중한 걸 스스로 끊어버린 그 결말이 참… 희망 고문도 아니고. 가장 원하던 사람에게서는 신뢰받지 못했다던가 오래된 권총에 총알이 없었다던가 하는 얘기를 보면 라이오넬은 일 저지른 것 맞겠네요.

라이오넬은 자기 손으로 친구를 죽이고 자기 죽음을 위장한 뒤 홀로 눈밭을 빠져나오면서 어떤 심정이었을지… 어쨌든 그때 라이오넬의 마음도 죽어버린 거겠죠. 오죽하면 그렇게 파싹 늙었겠어요. 다른 두 생존자랑 비슷한 나이대 맞죠? 그렇게 참극에 휘말리지만 않았어도 라이오넬은 알로이스가 마음을 터 놓기를 곁에서 끈기 있게 기다려줬을 텐데. 둘 다 한 발자국 내딛지 않고 과거를 그저 덮어만 두니 문제가 쉽게 안 풀렸겠지만… 어쨌든 그 사건 이후 복수를 위해 남은 인생을 건 점이나, 모든 것을 버렸어도 마지막까지 권총만큼은 간직한 점이 짠하네요. 라이오넬에게 알로이스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만큼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비비안은 사랑보다 부와 명예를 더 소중히 여기는 여자. 그 때문에 알로이스에게 접근했지만, 알로이스 자체에게도 호감은 있었던 모양입니다. 물론 죽었다 깨어나도 순수하게 알로이스를 위해 줄 인물이 아니긴 하지만요. 라이오넬과 비비안은 이미 서로의 속내를 꿰뚫어 본지 오래라 첨예하게 대립하지요. 삼각관계의 진상을 제대로 파악 못 하는 건 둔탱이 알로이스뿐… 비비안의 다이아몬드가 비극을 불러일으키는 방아쇠가 된 걸 보면 저주받은 보석이 맞나 싶습니다.

알로이스는 정말 마성의 남자네요. 그 덧없는 병적 아름다움이 여러 사람 홀려놨나 봅니다. 라이오넬과 비비안도 그렇고, 니나도 그렇고 동생만을 사랑한다던 애비게일도 그에게 은근히 호감을 품고 있었던 모양이고… 애비게일이 일 벌인 건 질투심과 배신감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봐요.

선택지를 고르면서 이런저런 루트를 밟다 보면 미처 몰랐던 부분이나 의외의 측면이 드러나 섬뜩하네요. 사람들 내면에 감추어진 기묘한 광기와 암울한 진실이 어우러져 퇴폐적이고 잔혹한 분위기를 풀풀 풍깁니다. 공식 홈페이지에 12세 이상 권장이라고 되어 있지만, 연령대를 조금 높여야 하지 않나 싶은 생각도 들고… 밑바닥에 깔린 내용이 잔인하고 선정적인 편입니다.

폐쇄된 공간에서 절박한 상황에 놓여 서로 두려움에 떨며 의심하고 미쳐가는 과정도 씁쓰름합니다. 어떤 루트에서는 선택지 어느 쪽을 골라도 배드 엔딩 떠서 고개를 갸우뚱 한 적도 있어요. 특히 The Magician 마지막 선택지는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 알로이스가 미지근한 녀석이라 그런 걸까요? 혹시 다른 루트 개방되면 내용이 바뀌나 싶어 다시 진행해 봤지만 그런 건 없더군요.

The Star는 깜깜한 현실 속에서 아직은 닿지 않는 희망을 살며시 드러내는 루트입니다. 알버트의 약혼녀 후보인 스텔라 양은 정말 야무지고 똑 부러진 아가씨네요. 시대랑 안 맞게 열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어서 괴짜 취급을 받지만… 알버트는 이 아가씨를 통해 현실과 맞설 용기를 얻고 또 다른 가능성을 엿보게 되니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겠죠.

중간에 특정 루트 엔딩을 보면 따로 열리는 루트는 스타트 메뉴에서 따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때 The Hierophant -> The Hanged Man -> The Lovers 순으로 하기를 추천합니다. 본편 루트는 알버트 시점―The Temperance 처럼 중간에 시점 전환되는 경우도 있었지만―으로 전개되는데, 나중에 열리는 루트는 다른 캐릭터 시점에서 알버트는 전혀 모르던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쌍둥이들이 품고 있던 어둠과 그 주변에 도사린 광기가 대단히 뿌리 깊네요. 둘이서 헤쳐온 고난의 시간이 만만치 않은 만큼, 서로를 향한 유대가 각별합니다. 쌍둥이들의 성별은 각각 남녀가 맞지만, 그 둘에게 신체적인 구분은 그다지 의미가 없고 서로를 동일한 존재로 인식하는 모양입니다. 그러고보니 이야기 진행 중 차림새에 속지 않고 쌍둥이의 성별을 제대로 꿰뚫어 본 건 그레이 백작 유일하네요. 루이스로 변장한 앨리스를 알아봤어요! 야성의 감이 참 무섭습니다. 알버트가 앨리스를 알아보는 장면도 나오긴 하지만 순전히 손바닥의 상처 때문에 깨달은 거고…

사실 ‘앨리스’는 성별을 뛰어넘어 쌍둥이 중 보호 받는 쪽의 역할 모델. 원래 쌍둥이들은 앨리스와 루이스 역할을 번갈아가며 했지만, 윌프레드가로 들어온 이후 고정되어버렸지요. 루프에서 벗어난 후 앨리스는 보호받아야 할 존재가 루이스라고 생각하고 ‘앨리스’ 역할을 루이스에게 넘겨 줬을 것 같아요. 그럼 양쪽 성별이 반전되어 버리는 셈이지만 아이들에겐 큰 의미가 없겠죠. 후일담 보면 알버트도 이를 알면서 그냥 내버려 두는 것 같고…

독선적인 패트리시아는 정말 제가 싫어하는 타입이네요. 자신의 생각을 무조건 남에게 강요하는 점이…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으면 악으로 규정하고,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습니다. 패트리시아는 호시탐탐 쌍둥이 남매를 떼어놓으려고 벼르고 있는데, 쌍둥이들은 점차 성장하면서 신체적으로 차이가 나게 되면 서로 갈라지게 될 것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들어 루이스가 저택을 떠나자고 앨리스를 종용하기도 했고…

탐욕스러운 에그먼드는 여러모로 죄가 깊습니다. 남의 물건 탐내지 마라! 사람도 함부러 죽이지 마라! 네놈 자작극 때문에 피해 입은 라이오넬에게 사죄해라! 변태짓도 그만둬라! 사실 에그먼드만 없었으면 사건이 그렇게까지 처참해지지 않았을 수도 있는데….

차례차례 루트를 거치면 모든 진실이 드러나는 「Fortune」이 열립니다. 「Fortune」에 해당하는 루트 세 개를 다 보면 대망의 엔딩! 「Fortune」에 이르러서는 알버트가 루프를 제대로 인식하고 있고 적극적으로 나서는 한편, 그동안 철저히 배제되거나 감춰졌던 인물이 수면위로 떠오르고 묻혀있던 과거사가 밝혀지면서 토막나 있던 연결고리가 이어집니다.

이때 전면으로 나서는 헨리의 대활약이 눈부시네요. 헨리 귀여워요! 하는 짓이 완전 푼수인데 얘가 나서면 분위기가 확 밝아집니다. 알버트의 행동을 오해해서 설레발 치는 모습이나 엉터리 시로 주변에 무시당하는 모습도 재미있고. 코렛트와 더불어 푼수 귀요미의 쌍벽. 이 게임 등장 인물 중 다른 루트에선 매번 일찍 퇴장해서 어둠에 물들지 않은 채 순수하게 밝은 인물은 헨리뿐인 것 같아요. 코렛트도 순수하긴 했는데, 지나치게 순수한 나머지 광기에 휩싸인 터라… 아, 스텔라도 순수하고 밝은 인물이긴 하군요. 심지가 굳어 광기에 거의 안 휩쓸리기도 하고…

모든 일의 원흉은 알버트의 고모 애비게일. 이 여자와 엮인 남자는 다 파멸로 치닫게 된다는 점에서 무시무시한 팜므파탈 같네요. 친동생과 조카에 대한 집착이 엄청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탓에 좋은 꼴 못 보게 되는 듯해요. 진실이 밝혀지면서 흑마술처럼 여겼던 알버트 어머니의 의식이 사실 분리 수술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등 이런저런 수수께끼가 풀리는데, 끝없이 이어지던 악몽 같은 사흘간의 루프가 악마가 개입된 현상이었다는 사실이 어쩐지 아이러니합니다. 그러고 보니 저택에 출몰하는 유령도 있었죠. 결국 가장 밑바닥에 깔린 건 신비주의인가.

 

어쨌거나 이야기상 루프하는 세계를 인식한 인물은 알버트와 알로이스와 앨리스와 애비게일. 정말이지 앨리스는 나이도 어린데 알버트 이상으로 맘고생 많이 했겠네요. 소중한 반쪽을 잃은 뒤 스스로 악마가 되기도 하고, 미로 속에서 길을 잃은 알버트를 보며 슬퍼하기도 하고… 마지막엔 지난 날의 과오를 곱씹으며 다급한 상황에서도 철저히 반쪽을 지키려 합니다.

이야기에서 ‘쌍둥이’라는 키워드가 제법 중요하네요. ‘쌍둥이’는 알버트를 옭아매는 과거의 상실이고, 시공을 뛰어넘은 현재의 유대이며, 다가오지 않은 미래의 두려움을 상징합니다. 하지만 쌍둥이라는 틀은 묶여있는 한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족쇄가 되기도 하지요. 영혼의 쌍둥이였던 알버트와 알로이스는 이어져 있던 탯줄을 분리하며 제갈길로 갔고, 앞으로 앨리스와 루이스도 서로 다른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며 홀로서기를 하겠죠. 집착 때문에 모든 것을 묶어 두려다 주변을 무너뜨리고 자신마저 망가져 버린 애비게일의 전철은 밟지 않을 듯.

그건 그렇고 알버트네 후일담이 훈훈해서 좋았는데, 평행 세계에 있는 알로이스와 라이오넬 뒷이야기가 없어서 참 아쉽네요. 그동안 답답하게 굴던 알로이스도 정신 차리고 라이오넬과 정면으로 마주했을 테니 일이 잘 풀렸겠지만… 거기서는 제발 모든 일이 평온하게 마무리되었으면 해요. 그런데 게임에서 뿌린 떡밥이나 복선은 다 회수되어 깔끔히 정리되었는데… 단 하나, 1862년에 시인은 왜 첫 번째로 죽었는지 만큼은 알 수 없네요. 어디 놓친 부분이 있었나…?

여러모로 공들여 만들었다는 느낌이 드는 작품입니다. 시나리오나 그래픽이나 음악 모두 나무랄 데 없고, 인터페이스도 깔끔하니 예쁘고. 타로카드와 22개의 엔딩을 대응해서 나타낸 부분이나, 게임 중 우클릭으로 불러내면 나오는 메뉴도 인상적이었어요. 다만 시스템이 조금 아쉽긴 합니다. 선택지에서 세이브 안 되는 건 참 불편하네요. 그리고 스킵 기능도 좀 안 좋아요. 보통 읽은 부분만 스킵하기를 지원하는데, 이 게임엔 그런 것 없이 전부 스킵이라… 중간에 게임의 진지한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게 깨는 엔딩도 섞여 있지만, 그건 개그로 받아들여도 될 듯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