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4일에 정식 개봉된『BLOOD-C: The Last Dark』를 보고 왔습니다. 작년에 부천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에서 상영된 적도 있지요. 정식 개봉한 건 좋은데 상영관이 너무 적네요. 서울에는 개봉관이 전멸이라 어쩔 수 없이 인천까지 가야 했습니다. 저는 영화공간주안으로 보러 갔는데 값도 싸고 화면도 꽤 큼직해서 좋더라고요. 백 명 남짓 수용하는 상영관에서 저를 포함해 총 여덟 명뿐인 쾌적한 환경에서 관람했습니다. 평일 낮이고 마이너한 작품이기도 하고 등급도 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겠지만… 관객 중 제법 연배 있는 분도 있어서 놀랐습니다.
『BLOOD-C』는 TV판이 이야기의 서장이고 극장판은 뒷이야기이자 완결편에 해당하는 작품이라, TV판을 접해야 내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을 듯합니다. TV판은 변죽만 울리다 막바지에 급전개하는 모양새가 딱 CLAMP스럽다고 생각했지만, 편수가 적어서 그런지 크게 거슬리지 않는데다 후반 내용이 제법 마음에 들었어요. 사야가 꽤나 귀엽게 나온데다 후미토가 제 취향 캐릭터이기도 했고… TV판은 피 튀기는 장면뿐만 아니라 노골적으로 씹히고 찢기는 고어신이 많아서 조금 부담스러웠는데 극장판 수위는 그보다 덜한 편이네요. 극장판의 표현이 더 바람직해요.
극장판은 작화나 액션신이 만족스러웠고 이야기 전개도 괜찮았습니다. 기억을 되찾은 뒤 냉철하고 강인한 여전사로 돌아온 사야의 모습뿐만 아니라. 마나를 비롯한 서라트 멤버 사이의 교류나 후미토를 향한 복잡미묘한 애증 등 사야의 내면 감정선도 제법 신경 쓴 듯합니다.
극장판 내용을 짤막하게 간추리자면 사야에 대한 애정으로 똘똘 뭉친 후미토의 민폐 삽질기…? 유력 가문인 나나하라가에서 태어난 후미토 도련님은 어쩌다가 사야라는 좀 특이한 아가씨에게 홀딱 반했는데, 이 아가씨 식성이 까다로워서 옛것밖에 안 먹는다네요? 그런데 옛것의 수가 점차 줄어드는 추세라 이대로라면 언젠가 아가씨가 굶어 죽을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사야의 근본적인 식성을 바꿀 수 있을까? 실험 실패. 옛것을 양산해 보자! 실험 실패. 인간을 옛것으로 바꾸어 그 수를 늘려 보자! 실험 실패. 사야가 인간을 죽일 수 없는 저주를 풀어보자! 실험 실패. 마지막 수단으로 인간과 옛것 사이의 약정인 주식면을 때려 부숴야지…
후미토는 목적을 위해 친족도 죄다 죽이고 온갖 학살을 벌이고 비윤리적인 실험을 자행한 것도 모자라 주식면을 파괴해 인류를 위협한 악당이긴 한데… 심하게 삐뚤어지긴 했어도 오로지 사야를 위해 모든 일을 꾸민 순정남이라는 사실이 짠하네요. 이렇게 보답을 바라지 않고 일방적으로 상대에게 쏟아 붙는 희생은 심금을 울리는 구석이 있어서… 자기 몸을 옛것으로 개조한 뒤에도 반 년 넘도록 제정신 유지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사야를 향한 집념과 정신력이 엿보이는 듯.
극장판 엔딩은 울적하고 씁쓸하긴 하지만 적절하게 마무리된 듯합니다. 엔드롤에 흐르는 주제곡 가사 중 ‘이정표는 당신뿐’이란 부분이 와 닿더라고요. 사실 사야에게나 후미토에게나 비록 거짓되긴 했지만 우키시마 시절이 가장 평온하고 행복한 한 때였을 거예요. 꾸며진 상황이긴 했어도 후미토의 마음은 진심이었고, 후미토가 본명을 그대로 쓴 이유도 그 발로일 듯합니다. 후미토는 중간에 누가 훼방 놓지만 않았더라면 한동안 그 생활을 이어갔겠지요. 결국 그렇더라도 잠시 유예 기간이 늘어날 뿐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단 하나뿐이었겠지만…
초반에 TV판 생존자인 유카가 나오기에 뭔가 활약하려나 싶었는데 비중이 공기. 초반 잠깐 후반 잠깐 나올 뿐이네요. 그래도 홀로 살아남아 목적 달성했으니 가장 성공한 인생?
그런데 극장판 준주역급 캐릭터인 마나의 성우가 별로였어요. 비중이 커서 자주 나오는데 연기가 엉성해서 참 거슬렸습니다. 다른 캐릭터들은 다 괜찮은데 왜 얘만 이럴까요? 차라리 엑스트라면 적게 나오니 그냥 넘길 텐데. 얼핏 본 바로는 전문 성우가 아니라는 듯…? 그리고 영화 자막에 오역이 많아서 좀 난감했습니다. 다른 건 그냥 신경 안 쓰고 넘긴다 쳐도 후미토의 마지막 대사는 참 중요한 부분인데 엉뚱한 내용이 자막으로 떠서 짜게 식었음…;;
그나저나 극장판 일본 공식사이트에서 볼 수 있는 「노네노네 극장」이 참 재미있네요. 노노와 네네 자매가 삐딱한 자세로 작품 세계관을 설명하는데, 후미토에게 악감정이 많이 쌓였는지 후미토를 신 나게 까대는 모습이 웃깁니다. 생각해보면 우키시마에서 지내던 사야의 모습과 기억 설정은 다 후미토 취향이 반영된 걸 텐데 안경+무녀+덜렁이+천연+경어 등 온갖 모에 요소를 한데 뭉쳐 놓다니… 거기에 사야를 24시간 카메라로 감시하며 지켜봤으니 변태 소리 들어도 할 말 없나…;; 집념 강한 부자 스토커는 스케일도 남달라서 이 정도는 애교 수준.
일본 공식사이트에서는 「노네노네 극장」뿐만 아니라 뒷설정도 공개하고 있으니 관심 있다면 한번 살펴봐도 좋을 듯합니다. 스포일러 포함이라 읽어보기 전에 미리 조심할 것!
P.S.1 네이게이터 화면이랑 모니터 화면에 뜬 모코나 귀염귀염.
P.S.2 사야, 커피에 심각한 트라우마가 생길 것 같음…;;
P.S.3 같은 상영관에서 봤던 남녀 삼인조 일행의 반응
여: 결국 후미토는 변태였던 거네.
남2: 후속작 나와도 사야가 행복해진다는 보장 없음. 오히려 더 구를지도 모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