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자의 이단서

우치다 쿄코의 데뷔작이자 중앙공론신사 C★NOVELS 판타지아 편집부에서 개최한 제1회 C★NOVELS대상 특별상 수상작입니다. 작가 이름으로 검색해 봐도 이 작품 외에 걸리는 책이 없는 것을 보아하니 이 이후에 집필한 소설은 아직 없는 모양입니다. 이와사키 미나코의 화집에 실린 작품소개를 보고 관심이 생겨 읽게 된 책입니다만… 그렇게 큰 기대는 안했는데 이게 정말 예상외로 재미있더군요. 흑백 삽화는 등장인물의 전신화가 다입니다만, 고풍스러운 일러스트가 작품과 잘 어울리는 듯 하네요.

이야기의 주인공은 파르고의 공주님. 공주님의 결혼식 도중에 남편이 될 아일톤의 왕자 팔지펄이 눈 앞에서 벼락을 맞고 실종되어 버리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에 대해 의문을 품는 공주님에게 주변에서는 왕자를 죽은 것이라 여기라고 말하지만, 이를 납득할 수 없는 공주님은 예비 수도승인 소꿉친구 이산을 이끌고 약혼자를 찾기 위한 여정에 나섭니다. 팔지펄의 행방에 대한 단서를 찾기 위해 현인 세라프를 찾아가기로 한 공주님 일행은 머독의 왕자 맨프레이트와 만나 행동을 함께 하게 되는데…

이 이야기는 교황예배당에 봉인되어 있던 ‘이름도 없는 공주님’의 모험담입니다. 공주님의 회고록이기 때문에 당연히 일인칭 주인공 시점. 정서부족 공주님을 어떻게든 공주답게 키우겠다고 눈에 불을 켠 유모의 특훈 덕분에 조건반사적으로 공주다운 미소를 지을 수는 있지만 사실 그다지 공주답지 않은, 무미건조한 성격의 공주님이 제법 마음에 들어요.

처음 작품 소개를 접했을 때 ‘이름도 없는 공주님’이란, 기록상 그 이름이 남아있지 않아 이름을 알 수 없어 ‘이름도 없는 공주님’이라 칭하는 것이겠거니 했는데… 말 그대로 ‘이름없는 공주님’이라는 것이 충격적이었습니다. 이 이야기 속의 세계관에서 여자는 하찮은 존재로 여겨지는데 여자는 결혼 전에는 아버지의 이름 아래, 결혼 후엔 남편의 이름 아래에서 불리우기 때문에 이름이 필요없다는 이유로 이름 자체가 부여되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따라서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몇 안되는 여성 캐릭터들에게는 전부 이름이 없습니다. 옛날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에스텔이란 아가씨는 유일하게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이 에스텔은 실재 여성이 아니고 세계의 개념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여겨지기 때문에 제외. 남녀평등의 문제는 둘째 치고 이름이 없으면 불편해서 어쩌나 하는 생각부터 들더군요. 어쨌든 주인공인 공주님의 정식명칭(?)은 ‘파르고의 게데릭의 딸’입니다. 우리나라식으로 따져보면 ‘서울지방 김서방의 딸’이라는 느낌. 아니, 딸부자집일 경우에는 헷갈려서 어쩐대…;;

이야기를 읽는 내내 맨프레이트×공주님 커플에 눈이 가더군요. 처음에는 맨프레이트의 비아냥에 울컥하는 공주님이지만, 여행중에 생사고락을 함께 하며 서로 빈정거리고 투닥거리는 두 사람의 모습이 제법 잘 어울려요. 항상 틱틱거리는 맨프레이트지만 알게 모르게 공주님을 챙겨주는 것도 좋고… 맨프레이트는 그 누구보다 공주님을 제대로 이해하는 인물인데다, 때마침 공주님의 이상형인 검은 머리(^^)이기도 하니 얼마나 좋아요.

이하 맨프레이트와 공주님의 만담?

“말한대로 귀엽고 현명한 공주님이죠? 오히려, 정식으로 청해보는 것은 어때요?”
내가 말하자, 맨프레이트는 아주 꺼림직한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나더러 동생이 되라는 건가?”
“그렇게 되면 예의를 가르쳐 드릴게요.”
“그대가 타인에게 어떤 예의를 가르칠 수 있다는 거지?”
“왕자로서 완벽한 예의를 가르쳐드리는 것은 무리라도, 사람으로서 최저한필요로 하는 예의 정도는 가르쳐 드릴 수 있어요. 당신에겐 배워야만 하는 것이 많은 듯 하니까요.”
“타인에게 무엇을 가르칠 여유가 있다면 그대 자신이 검술과 승마를 배우도록. 그렇지 않으면 사람으로서 만족스런 수명을 누릴 수 없을 거다.”

 

의기양양하게 말한 나를 바보 취급하듯이, 맨프레이트는 간단히 대답했다.
“걸어간다.”
“절벽을 내려가는 거예요? 걸어서?”
“떨어져 볼텐가?”
절벽은 눈이 아찔할 정도의 높이였는데 하이퍼의 동굴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떨어지면, 아픔을 느끼기 전에 죽을 것이다. 계곡 아래로 미끄러져서 암반에 부딪친 후, 비참하게 뇌수를 흩날리는 내 모습을 상상하니 소름이 끼쳤다. 통과의례 도중에 죽으면 웃음거리 밖에 안된다. 그래도 현실의 세상 속에서는 그쪽의 확률이 훨씬 높은 것이다.
“…그런 다음, 다시 오르는 거예요? 절벽을?”
“일생을 계곡 아래서 살 셈인가?”
“어딘가 다리는 없나요?”
“그런 희망적 관측은, 이 높이의 도리를 축조할 방법에 대해 생각하고 나서 해.”

하지만 중요한 순간에까지 냉정한 태도를 취해서야 둔탱이 공주님은 아무것도 모를텐데, 솔직하지 못해서 손해보는 불쌍한 맨프레이트…ㅜ.ㅡ(그게 맨프레이트 답긴 합니다만…)  설교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지말고 조금쯤은 남자의 순정을 알아줘도 좋으련만… 정말이지 무심한 공주님이에요. 맨프레이트가 등자보다 더 맛좋은 머독의 특산물로 공주님께 어필했다면 두사람에겐 좀더 다른 미래가 펼쳐졌을지도 모르는데 아쉽습니다. (그리도 등자가 좋았던건가요, 공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