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돌아가는 히나 인형: Little birds can remember

호타로와 고전부원들의 쌉싸름한 청춘을 다룬 일상 미스터리 고전부 시리즈 제4권입니다. 이번 권은 1학기 -> 여름방학 -> 2학기 -> 겨울방학 -> 3학기 -> 봄방학 순으로 일 년간의 흐름에 따라 이어지는 일곱 편의 이야기를 다룬 단편집이네요. 짤막한 단편 모음이지만 일 년간이라는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고, 호타로와 주변 사람들의 관계와 감정선이 잘 드러나서 마음에 들었어요.

해야 하는 일이라면 간결하게: 호타로가 에루를 만난 지 한 달이 채 안 된 시점. 호타로는 사토시에게 음악실 괴담을 전해 듣습니다. 그런데 그 괴담의 진원지는 에루가 속한 1-A반. 호기심의 화신인 에루가 듣고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닙니다. 아니나 다를까 호기심에 가득 차 득달같이 달려온 에루의 호기심을 잠재우기 위해 호타로는 다른 괴담 이야기를 끄집어내는데…

자기 좌우명을 위해 꼼수 쓴 호타로가 찜찜해하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에 티 내지 않고 장단 맞춰주는 사토시와의 관계도 인상적이네요. 이때 겪은 일이 뒤에 호타로 행동에 영향을 미칩니다.


대죄를 범하다: 호타로가 수업받는 도중 옆 반에서 큰 소란이 일어납니다. 수학 교사의 호통 소리와 뒤이어 들리는 에루의 화난 목소리. 평소 에루가 화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던 호타로는 이를 의아하게 여겨 그 이유를 넌지시 묻지요. 알고 보니 수학 교사가 착각을 일으켜 부당하게 학생들을 다그친 것이었습니다. 에루는 수학 교사가 어째서 착각하고 화를 냈는지 신경 쓰는데…

“그럼 치짱은 화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러네요. 어떤 일에도 화낼 수 없다면, 아마 아무것도 좋아할 수 없지 않을까요.”
……나는 화낼 수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면서 치짱이 화내지 않는 이유는 뭐야?”
즉답이었다.
“피곤하니까요. 피곤한 일은 하고 싶지 않아요.”
오오?
안색이 바뀐 히토시가 머리를 감싸 안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치, 치탄다 양이 호타로에게 물들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그것만은 막았어야 했는데. 요괴가 카미야마 고교를 배회하고 있다, 에너지 절약주의라는 요괴가!”
“아뇨, 저기, 농담인데요.”
침묵에 휩싸였다.

분노의 감정에 관한 이야기. 호타로가 이리저리 치이면서 내심 투덜대는 모습이 귀여웠습니다.


정체를 알고 보니: 8월 여름 방학. ‘빙과’ 사건 후, 여러모로 고생한 고전부 부원들에게 보답하고 싶다는 에루의 뜻에 따라 호타로 일행은 온천 여행을 떠납니다. 때마침 마야카의 친척이 경영하는 여관이 공사 중이라 무료로 숙박할 수 있게 되었지요. 호타로 일행은 여관집 딸인 리에와 카요 자매를 만나게 되는데, 그 중 리에에게서 본관에 있는 한 방에서 유령이 나온다는 괴담을 전해 듣습니다. 그 후 늦은 밤, 에루와 마야카는 그 방 창문에서 비친 유령을 목격하게 되는데…

어딘지 씁쓸하고 현실적인 자매 관계가 주축이 된 이야기. 저도 자매가 없어서인지 사이 좋게 지내는 자매의 모습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해서 에루가 은연중 동경하는 마음을 알겠는데… 역시 실재 형제자매 관계가 다 좋을 리는 없겠죠. 그렇다고 심하게 낙담할 필요까지 없겠지만…


짐작이 가는 사람은: 칸야제가 끝나고 11월 1일.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에루의 태도가 못마땅한 호타로는 자신의 평온한 생활을 위해 에루의 인식을 정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추리가 특출난 재능이 아니라 우연과 행운의 결과라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에루와 추론 게임을 벌이기로 하지요. 때마침 울리는 교내 방송을 소재로 벌이는 호타로의 에루의 추론 이야기.

장난삼아 벌인 추론이 결국 뒤에 가서 맞아떨어져서 호타로의 재능이 한층 더 빛을 발한 이야기? 어차피 호타로와 에루는 장난삼아 추론 벌이며 노느라 본래 목적은 까먹었지만요…^^;


새히 복 많이 받으세요: 새해 설날. 호타로는 에루의 권유를 받고 마야카가 무녀 알바를 하는 아레쿠스 신사로 참배를 가게 됩니다. 아레쿠스 신사는 치탄다가와 교류가 있는 주몬지가가 운영하는 곳. 에루는 정신없이 바쁜 친구 주몬지 카호를 돕고 싶다는 마음에 심부름하러 나서는데, 사소한 착각과 불운이 겹친 나머지 호타로와 에루는 창고에 갇히고 맙니다. 단둘만 있는 상황은 오해를 부를 수 있어서 치탄다가의 체면 때문에 차마 대놓고 도움을 부를 수도 없는 상황. 호타로와 에루는 어떻게 하면 일을 크게 만들지 않고 조용히 창고를 빠져나갈 궁리를 하는데…

“오레키 씨는 뭐 하셨어요?”
“나는…… 소라게 생태 모방.”
“에?”
오늘은 추웠다.
너무 추워서 견딜 수 없는 터라 나는 아침부터 소라게를 본받기로 했다.
즉, 코타츠에서 얼굴만 내밀고 귤을 제2의 벗으로 삼아 시간을 보냈다. 소라게라기보다 달팽이였을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업무상 인사차, 누나는 뭔지 잘 모를 이유로 집을 비워서 나는 마음껏 생태학 연구에 힘쓸 수 있었다.
문고본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고, 배고프면 떡국을 먹고, 마음 내키면 연하장을 정리했다. 이래저래 지내다 보니 1월 1일의 시각은 정오가 되고, 오후가 됐다. 텔레비전을 트니 하고 있던 ‘신춘 드라마 스페셜 풍운급 오다니성’을 느긋하게 보고 있자니 해가 졌다.

추운 한겨울, 호타로의 소라게 생태 모방이 인상적이었어요. 추우면 움츠러드는 그 심정 공감 갑니다. 바람직한 겨울나기 방법이네요. 그리고 컴컴한 저녁 시간대에 호타로와 에루, 단둘이서 두근두근 밀실 시추에이션… 이면 좋겠지만 추워 죽겠는데 그런 게 있을 턱이 있나… 마지막에 에루의 재채기 섞인 발음이 귀엽네요.

마야카의 마음을 거절하는 사토시의 심정이 드러난 이야기였습니다. 첫 번째 단편 「해야 하는 일이라면 간결하게」에 뒤이어 호타로와 사토시의 관계와 속내가 표현된 것도 좋았어요.


멀리 돌아가는 히나인형: 4월 봄방학. 호타로는 에루에게서 미즈나시 신사에서 주최하는 히나마츠리 행사를 도와줄 수 없겠냐는 전화를 받습니다. 미즈나시 신사는 음력 히나마츠리 때 사람들이 히나 인형 분장을 하고 마을을 도는 데, 때마침 우산을 씌워주는 역할을 맡은 사람이 다쳐서 체격이 비슷한 호타로에게 부탁해 온 것이지요. 귀찮기는 하지만 수고비도 나오고 곤란한 에루를 도와줄 겸 별 부담 없이 부탁을 받아들인 호타로였으나, 행사 전 뜻밖의 문제가 생기는데…

아아, 하고 나는 생각했다.
이 상황은 좋지 않다, 라고. 이렇게 치장한 모습은 좋지 않다. 아뿔싸. 아마도, 나는 무슨 수를 써서 라도 여기에 오지 말았어야 했다.
그렇다는 것은 즉, 무슨 일인가 하면.
즉……
오레키 호타로는 비교적 일본어에 뛰어난 편이라고 자부하고 있다.
더불어 이론적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조리 있는 사고방식으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타입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날, 카미야마 시 미즈나시 신사 경내에서 어느 봄날, 오전 11시 45분 이후, 주니히토에(十二単)를 입고 걷는 치탄다를 본 순간.
어째서 자신이 ‘아뿔싸’라고 생각했는지, 아무래도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리저리 생각해 봤지만 아무리 고민해도 설명할 수 없었다.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라면 하지 않는다. 해야만 하는 일이라면 간략하게. 이 에너지 절약주의가 치명적인 위협을 받고 있다. 그런 예감만이 들뿐 어째서 그런 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저 나는 한결같이 이런 아뿔싸, 이 상황은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호타로와 에루의 미묘한 감정선이 드러나는 이야기. 에루가 곱게 치장한 모습을 보고 심하게 동요하는 호타로의 모습이 매우 신선했어요. 에루의 호기심에 휘둘리기도 하고 이것저것 에루를 배려해주긴 해도 자기 페이스를 잃지 않던 녀석이었는데. 에루의 장래 이야기를 듣고 에루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당황하며 사토시의 심정을 이해하는 호타로의 모습도 인상적. 호타로와 에루, 콤비로도 귀엽지만 커플도 좋겠다 싶어요.

단편별로 나눠쓰다 보니 조금 길어져서 접었습니다. 어쨌거나 이번 권으로 호타로네 1학년 시절 이야기는 끝났네요. 문고화되지 않은 단편도 있는 모양이지만 일단은…애니메이션화 되는 것도 이번 권까지인 모양이고요. 이제 안심하고 애니메이션 봐도 되겠다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