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MNESIA

기묘한 공간에서 눈을 뜬 주인공은 스스로 정령이라고 칭하는 소년 오리온과 마주합니다. 의도치 않은 사고 때문에 오리온은 주인공 몸속에 갇히고, 주인공은 기억을 잃게 된 것이지요. 오리온은 원래대로 되돌아가기 위해서는 잃어버린 주인공의 기억을 되찾아야만 한다고 하며 기억을 찾는데 협력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8월 1일 아침, 자신이 속한 세상에서 눈을 뜬 주인공은 기억을 전부 잃어버려서 자신의 주변 상황도 주위 인간관계도 완전히 백지인 상태. 혼란스러운 주인공 앞에 주인공의 연인인 듯한 남자가 나타납니다. 누구를 신용하면 좋을지 불분명한 상황에서 자신의 기억상실을 숨긴 채 오리온과 기억의 실마리를 쫓는데…

 

여성향 게임 브랜드 오토메이트에서 내놓은 연애 어드벤처 게임입니다. 제법 인기가 있었던 터라 팬디스크『AMNESIA LATER』가 나왔고 현재 신작 개발 중인 모양입니다. 『데저트 킹덤』에서 접했던 하나무라 마이가 원화를 맡았대서 좀 놀랐어요. 분위기가 전혀 다른데… 하지만 오리온의 다채로운 표정과 이런저런 개그컷을 보고 비스무리하다고 납득했습니다.

게임 목적은 8월 한 달 동안 잃어버린 주인공의 기억을 되찾아 모든 것을 원래 상태로 되돌리는 것. 주인공은 기억을 잃은 상태라 완전 백지상태로 성격이고 특성이고 없습니다. 정말 아무것도 몰라 맹한 상태인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런 주인공을 이끌어줄 파트너 오리온이 있습니다. 옆에서 이것저것 설명을 하고, 이런저런 감정을 표출하는 등 플레이어의 심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플레이어의 심경을 대변해주는 캐릭터네요. 플레이어 대부분이 백지 주인공보다 오리온에 감정이입을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주인공도 기억을 찾게 되면 슬며시 개성이 드러나긴 하지만요.

공략대상은 붙임성 없는 한 살 연하 소꿉친구 신, 주변에 여자가 끊이지 않는 아르바이트 선배 잇키, 감정결핍에 세상만사를 이론으로만 따지는 켄트, 곁에서 늘 오빠처럼 주인공을 챙겨주는 토마, 언제나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를 늘어놓는 우쿄 등 총5명. 초반 선택지에서 공략대상과 루트가 갈리기 때문에 공통 루트는 전혀 없고, 루트마다 상황이나 설정이 바뀝니다.

겉보기에는 메인 히어로 처럼 보이는 신 루트. 신 루트에서 주인공은 산장에 놀러 갔다가 다쳐서 병원에 입원한 상태에서 눈을 뜹니다. 그런데 주인공이 다친 건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상해 사건. 현재 사건의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받고 있는 사람이 바로 주인공의 연인인 듯한 신이라고 합니다. 그 후 과연 누가 주인공을 다치게 한 진짜 범인인지 추리해가는 미스터리 전개가…

잇키 루트는 초반에 대놓고 잇키가 바람둥이처럼 나와서 좀 껄끄러웠어요. 주인공은 잇키랑 사귀는 사이인데 왜 다른 여자애들 눈치나 보면서 냉대를 당해야 하는가… 그런데 이야기를 진행해 가다 보면 잇키가 주인공에게 품은 마음이 진심이고 의외로 순정파에 남들 앞에서 외면하는 건 다 주인공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사실이 드러나니 좀 마음이 풀리더군요.

켄트 루트는 가끔 우쿄가 나타나 공포 분위기 조성하는 것 빼면 일반적인 연애물스러운 흐름이네요. 이론과 합리를 따지는 켄트와 감정과 감성을 중시하는 주인공 사이에 벌어지는 불협화음이 주된 갈등 원인입니다. 그 왜, 흔히 말하는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란 표현이 딱 맞는 커플입니다. 켄트는 이론에 치중한 나머지 나사 빠진 모습을 종종 보여줘서 웃겼어요. 켄트 부모님은 켄트보다 한술 더 뜨는 이론파 커플이라 일반인은 범접 못할 듯. 켄트 루트 플레이하다 보니 왜 내가 게임 하면서 수학 문제나 풀고 있어야 하는지 조금 회의감이 들기도 했습니다만…

그리고 토마 루트. 공략 캐릭터 중에서 토마가 제일 마음에 들었어요. 토마 루트에서는 처음부터 주인공이 토마의 기억을 떠올리기도 하고 공략 캐릭터 중 유일하게 주인공의 의심수치가 있는 등 다른 캐릭터와는 차별화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주인공을 지킨다는 마음가짐이 토마의 지상 명제입니다. 보통 토마는 주인공을 좋아해도 뒤로 물러서는 경향이 있어서, 주인공이 맘 먹고 적극적으로 다가서지 않으면 두 사람이 평온하고 행복하게 맺어지기 힘들 듯…

토마는 다른 평행 세계도 자기 마음 꾹 누르고 믿음직한 오빠 포지션에서 주인공을 돌봐주고 지켜줍니다. 주인공을 사이에 두고 신과 토마가 삼각관계를 이루는 모습이나 잇키 루트에서 의붓오빠로 주인공을 잘 챙겨주는 모습이나 항상 주인공을 걱정하고 챙겨주는 모습이 좋네요. 보답 못 받을 외사랑이 짠합니다… 다만 특정 조건을 충족시켜 스위치가 켜지면 얀데레로 각성해 버리는군요. 본인 루트에서 폭주하는 것도 그렇고 신 루트에서 감정을 잘 억눌러오다 자신을 신으로 착각한 주인공의 태도에 욱하고 폭발해서 일벌리는 것도 그렇고. 우쿄가 인증한 미친놈임…;;

그리고 마지막으로 히든 캐릭터이자 진 히어로 우쿄 루트. 모든 평행 세계를 하나로 묶어주는, 이야기의 시작이자 끝입니다. 게임상에서 계절에 안 어울리게 서늘하다는 말이 자꾸 나오고, 오리온이 자기 주인이라는 신을 종종 언급했는데 그 떡밥이 우쿄 루트에서 회수되는군요.

우쿄는 다른 루트에서 영문 모를 말로 주인공을 혼란스럽게 하고 갑작스럽게 공포 분위기 조성하는 등, 여러모로 알 수 없는 인물이었는데… 본인 루트에서도 독특한 행동을 해대네요. 우쿄의 노숙자(?) 행각이나 전파계스러운 발언 등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어쨌거나 우쿄가 이래저래 엄청나게 고생하긴 했는데… 중간에 일이 뒤틀려 다른 평행 세계 주인공이 위험에 처하게 되는 터라 아이러니. 우쿄가 연인의 삶을 바라는 마음과 본인의 삶을 갈구하는 본능이 충돌해 한없이 망가지고 절망하는 모습을 보아하니 좀 짠합니다. 처음엔 우쿄가 얀데레인줄 알았는데, 반복되는 죽음의 고통 때문에 미쳐버려 또 다른 인격이 생겼던 모양이군요.

공략 캐릭터 외에도 오리온과 조연 캐릭터도 매력적이에요. 오리온은 플레이 내내 끊임없이 조잘조잘 플레이어의 심경을 대변해줘서 참 정감가고 귀여운 파트너였고. 평행 세계마다 변화무쌍한 와카 점장이나 개성 있는 여성 캐릭터도 좋네요. 특히 미네 귀여워요. 처음 플레이한 게 켄트 루트였는데, 미네가 주인공에게 적개심을 불태우며 얄밉게 굴길래 뭔가 했더니… 귀여운 오해였네요. 하는 짓을 보면 참 앙큼한 게 미워할 수 없네요. 다른 루트에서도 애교 있는 게 깜찍하고.

독특한 분위기와 세계관이 인상적인 게임입니다. 캐릭터도 매력적이고 작화도 예쁜 편이고… 일반 이벤트 CG도 좋지만 중간마다 삽입된 아이캐치 CG가 참 귀엽고 독특해서 좋았네요. 팬디스크인 『AMNESIA LATER』도 플레이해 봐야겠네요. 새로 개발 중이라는 신작도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