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각의 이야기는 선율.
그 선율은 더욱더 큰 이야기와 함께 점차 공명한다……
「하늘과 세계」, 「끝과 시작」, 「문학과 화학」,
「구세주와 영웅」, 「오빠와 여동생」, 「해바라기와 언덕길」.
언어는 선율이 된다. 『멋진 나날』 은 그러한 이야기.
18금 남성향 게임 제작사 케로Q에서 내놓은 게임입니다. 처녀작 『종말의 하늘』을 리메이크한 작품인 모양이에요. 평도 좋고 작화도 괜찮고 해서 붙잡아 보았습니다. 몰입해서 즐기긴 했지만 감상을 어떻게 써야할 지 막막하네요. 사람 혼을 쏙 빼놓는 전파 게임…? 완성도는 높은데 쉽게 다른 사람에게 권하기 좀 애매합니다. 기묘한 분위기와 연출 때문에 심하게 취향 탈 것 같아요.
시나리오 순서대로 이웃에 사는 소꿉친구 와카츠키 자매와 함께 적당히 학창생활을 보내는 여고생 미나가와 유키 시점에서 펼쳐지는 하늘과 세계의 이야기 「Down the Rabbit-Hole」, 오타쿠 성향과 유약한 성격 때문에 학교에서 이지메 당하는 소심한 고교생 마미야 타쿠지 시점에서 펼쳐지는 끝과 시작의 이야기 「It’s my own Invention」, 예쁜 외모와 분위기 파악 못 하는 성격 때문에 이지메 당하는 타카시마 자쿠로 시점에서 펼쳐지는 문학소녀와 화학소녀의 이야기 「Looking-glass Insects」, 마미야 타쿠지를 증오하며 괴롭히는 불량아 유키 토모사네 시점에서 펼쳐지는 구세주와 영웅 이야기 「Jabberwocky」, 오빠를 무척이나 따르는 마미야 타쿠지의 여동생 마미야 하사키 시점에서 펼쳐지는 오빠와 여동생 이야기 「Which Dreamed It」, 숨겨진 과거를 다룬 이야기 「JabberwockyII」 등 총 6편.
유키 시점에서 펼쳐지는 첫 번째 이야기 「Down the Rabbit-Hole」은 평온하면서도 신비하고 기묘한 세계관을 드러냅니다. 이 이야기가 맨 마지막에 세계관의 중요한 키워드로 언급되기도 하고… 여기서 엔딩 세 가지를 보면 오프닝이 나오는데, 여기서 와카츠키 자매 엔딩은 왜 있는지 모르겠음. 오프닝 후 기존과 다른 전개로 펼쳐지는 「Down the Rabbit-HoleⅡ」로 넘어갑니다.
시점마다 비춰지는 모습이나 사실이 달라서 혼란스럽습니다. 어긋난 인식과 사실을 어찌 파악해야 할지, 어느 것이 진실인지 가늠하려면 머리를 굴려야 하고… 이야기를 진행하면서 드러나는 인물의 성격이나 사건의 진상이 이전 시점의 캐릭터가 파악한 내용과는 달라 새로운 느낌이 듭니다. 게임을 하다 보면 개인의 주관이라는 게 믿을 것이 못 된다는 생각이 샘솟기도 하고…
유키의 소꿉친구이자 타쿠지의 클래스메이트인 쌍둥이 자매 와카츠키 카가미와 츠카사는 처음 볼 때부터 어딘가 익숙하달지 친숙하달지 싶었지만… 게임상 패러디도 많이 나오고 하니 흔히 쓰이는 클리셰의 일종이라 생각했는데 이게 다 밑바닥에 깔린 이유가 있었네요. 타쿠지 시점의 대화나 자쿠로 시점에서의 만남을 보면 이 쌍둥이 자매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는데, 타쿠지의 행각을 떠올려 보면 충격과 공포입니다. 유키와 타쿠지 인식 속에 구축된 자매의 설정은 기존에 있었던 사실과 기억을 왜곡해서 어느 정도 합리적으로 짜맞춘 결과라는 점이 인상적이었어요.
플레이하면서 솔직히 중반부에 허들이 좀 높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정서불안에 중이병에 찌든 마미야 타쿠지 시점 시나리오를 보면서 ‘이것들이 단체로 약 빨고 무슨 미친 짓이야!’라는 생각이 절로 들기도 하고, 마미야 타쿠지와 타카시마 자쿠로 시점에서 펼쳐지는 이지메 행각에 엄청난 혐오감이 들기도 하고… 정말 타쿠지 시점 밟으면서 혼란스러워 혼이 쏙 빠지는 느낌이었습니다. 타쿠지와 자쿠로 시점을 넘어가면 그렇게까지 거슬리는 부분은 없었지만…
본의 아니게 사건의 발단이 된 자쿠로는 유키 시점에서 영문 모를 소리를 하는 어딘가 신비한 전파소녀였고, 타쿠지 시점에서 타쿠지의 망상이 뒤섞여서 숭고하고 이상적인 소녀로 비춰졌는데 그저 소심하고 평범한 소녀였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점이 인상적이었네요. 타쿠지의 추측상 친구인 자쿠로를 배반하고 괴롭혔다고 여겨졌던 키미카 역시 정신 똑바로 박힌 개념인이었고… 얘네 둘이 서로 손잡고 이지메에서 탈출하는 엔딩은 속이 편하더라고요.
하여간 같은 반 메구와 사토코의 마수에 걸려 자쿠로가 망가져 가는 과정을 보고 있자니 참 괴로웠습니다. 정신이 불안정해져 길 잘못든 자쿠로가 결국 사망하고, 이 때문에 타쿠지의 폭주가 시작되고 충격받은 키미카가 이에 동조하게 되는 통에 피해가 겉 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되었는데… 이지메 저지르는 애들을 보며 ‘이 갈아버려도 시원찮을 것들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더라고요.
게임에서 매력적인 캐릭터가 많지만 그중에서 유키랑 토모사네 커플이 좋네요. 투닥거리는 모습이 참 풋풋하고 귀엽습니다. 토모사네는 유키 시점에서는 전혀 안 나오다가 타쿠지 시점에서는 악당으로 나오고, 자쿠로 시점에서는 붙임성 없지만 의외로 배려심 있는 녀석으로 나오는데… 토모사네 시점에 들어서니 또 인상이 바뀌네요. 유키와 하사키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며 망가지는 모습이 귀여워요. 이때 툭하면 질투심 불태우며 끼어드는 하사키가 좀 거슬리더군요.
그나저나 타쿠지보다 유난히 토모사네를 따르며 챙기는 하사키를 보면서 어째 좀 이상하다고는 생각했는데, 그 뒤에 숨겨진 내막이 있었군요. 전혀 생각도 못한 진실이라(그동안 드러난 사실만으로는 추측할 소재가 부족하긴 했지만…) 의외였어요. 그간 머릿속에 심어졌던 타쿠지와 유키와 토모사네의 상관 관계가 무너지는 내용이었으니… 얘가 토모사네에게 매달리는 상황을 전혀 이해 못 할 것도 아닌데, 이게 좀 지나치지 않나 싶기도 하고… 기억과 인식이 어긋난 유키를 향해 심한 소리를 하는 모습도 좀 껄끄럽고… 타쿠지를 원망하는 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유키는 정말 태양같이 반짝반짝 빛나는 아이라 좋습니다. 토모사네는 유키야말로 타쿠지가 이상으로 삼았던 인격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토모사네가 가장 동경하던 존재. 그 사실은 유키 루트에서 츠카사의 입을 통해 드러나기도 했죠. 어린 토모사네 시점 과거사에서도 그렇고. 원래 연상연하 커플은 취향 아닌데, 토모사네랑 유키는 적극 밀어주고 싶네요. 어차피 유키는 변한 게 없으니 외모나 정신연령은 동갑이고….? 「해바라기 언덕길」 엔딩에서 언제까지 함께 할 수 있을지 확실치 않아 불안하지만, 그래도 토모사네 곁에 남아 일상을 보내는 모습이 아련하네요. 마지막에 유키가 진지한 분위기를 깨뜨리며 밥먹으러 가자고 얼버무리면서 끝나지만, 유키도 토모사네도 결국 앞으로 어찌될지 모르는 상황인 건 변함 없고…
이지메와 종교라는 형태로 드러나는 집단 광기, 이에 휘말려 사람의 인격이 망가져 가는 모습, 개인이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세계의 형태와 그 한계 등 이런저런 소재를 버무려 잘 엮어 놓은 작품입니다. 각각의 시점이 맞물리면서 숨겨진 과거나 진실이 드러나기는 하지만 명확지 않은 부분은 결론짓지 않고 끝나네요.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고, 맞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여러시점을 통해 이야기의 다른 양상을 접하고 과거 이야기를 거치며 완전하지는 않지만 여러 가지 의문과 떡밥이 풀리고 에필로그 「멋진 나날」, 「해바라기 언덕길」에서 평온하고 훈훈하게 이야기가 마무리되나 싶더니…. 최종 엔딩 「종말의 하늘 Ⅱ」에서 남아 있던 떡밥을 건져 올리며 이것저것 가설을 뿌려대고 이야기를 혼돈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습니다.
마지막에 오토나시 아야나와 마주하며 대화하는 유키. 종말의 하늘 너머 그 앞을 볼 사람은 타쿠지도 토모사네도 아니라는 아야나의 말은 이 뜻이었군요. 아야나의 말에 따르면 여러 가설은 어디까지나 주석. 유키가 마음에 들어 할지 어떨지는 알 수 없다는 말을 남기는데, 결국 명확한 답 따위 없는 거예요.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는 무한 연쇄의 굴레. 최종 엔딩 「종말의 하늘 Ⅱ」 덕에 중후반에 희석되었던 기묘한 세계관이 제대로 완성되는 듯하네요.
잘짜인 시나리오와 뛰어난 연출에 예쁜 작화와 좋은 BGM이 어우러진 작품입니다. 문학 작품이나 서브컬쳐 패러디가 잔뜩 나오니 관련 지식이 풍부하다면 더 즐겁게 플레이할 수 있을 듯합니다. 다만 호불호가 갈릴만한 내용이라… 잔혹한 묘사나 폭력적인 내용이나 혼란스러운 연출을 싫어하시는 분 또는 비위 약하신 분은 삼가는 게 좋을 듯싶네요. 이지메 행각이 참 적나라하게 나와서요. 중이병이나 전파계가 부담스러우신 분에게도 쉽게 권할 수 없을 것 같네요. 마지막까지 꿋꿋이 플레이하면 참 좋은 작품입니다. 어설프게 중간에 손 놓으면 이도 저도 아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