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write

문명과 초록의 공존이라는 이상을 내건 녹화 도시 카자마츠리. 그곳에 사는 텐노지 코타로는 칸베 코토리, 요시노 하루히코 등 친구들과 평범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평화로운 카자마츠리 시에 연례행사인 수확제가 찾아온다. 이 시기와 맞물려 코타로의 신변에 기묘한 현상이 닥쳐오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오컬트 연구회의 회장인 센리 아카네와 인연을 맺게 된다. 그 후 오컬트 연구회에 다른 동료들을 끌여들여 즐거운 청춘을 구가하려는 코타로의 앞에 기묘한 사건과 진실이 펼쳐지는데… ───고쳐 쓸 수 있을까. 그녀의, 그 운명을.

 

Key에서 제작한 전연령 대상 연애 어드벤처 게임입니다. 전연령판 발매 후 18금판을 내놓아서 유저들을 울렸던 『리틀 버스터즈!』와는 달리, 이 작품은 앞으로 18금판이 나올 계획은 없는 모양이에요. 2008년 만우절에 처음 제작 발표해서 여러 사람을 거하게 낚은 뒤 2011년에 처음 PC판으로 발매되었습니다. 유명 시나리오 라이터가 여럿 참가해서 크게 화제가 되었나 보네요. 제가 플레이한 건 올해 4월에 발매한 PSP판이고, 8월 말쯤 PS Vita판이 발매될 예정인 듯합니다.

공략 대상은 허물 없는 소꿉친구 칸베 코토리, 부잣집 아가씨인 괴력의 전학생 오토리 치하야, 학원의 마녀라 불리는 오컬트 연구회(이하 오컬연)의 회장 센리 아카네, 선도위원 소속 후배 나카츠 시즈루, 결벽증 기미의 깐깐한 반장 코토하나 루치아, 수수께끼의 소녀 카가리 등 총 6명.

초반에는 특별한 힘을 숨기고 있지만 평범하게 청춘을 누리고 싶어하는 소년 코타로와 그 주변에 모여든 동료들을 중심으로 유쾌하고 시끌벅적한 학창 생활이 펼쳐집니다만… 비일상과 맞딱뜨리게 되면서 평온한 일상이 깨지고, 세상의 위기를 둘러싼 여러 집단과 이해관계가 얽히게 됩니다. 당연하게도 어느 루트를 타느냐에 따라 코타로의 입장이 여러모로 달라지게 됩니다.

소꿉친구인 코토리는 여타 다른 매체에서 자주 보이는 그저 순진하고 맹한 타입이 아니라서 나름대로 신선했네요. 코타로와 쿵짝을 맞춰 어울려 놀거나 종종 소악마적 기질을 보이며 코타로를 휘두르는 모습이 귀여워요. 다른 루트로 빠지면 코빼기도 안 보여서 조금 섭섭합니다. 나름대로 중요한 포지션인데다 다른 루트에서도 알게 모르게 도움의 손길을 뻗기도 하는데 말이에요.

치하야는 세상물정 모르는 아가씨에 괴력에 먹보에 천연기질에 포니테일에 경어라는 여러 요소를 뭉쳐놓은 모에 덩어리일 텐데 사실 치하야보다 집사인 사쿠야가 인상적이었네요. 게임 전체적으로도 코타로의 성장을 이끌어주거나 결정적인 순간에 큰 도움을 주는 중요한 역할이었고. 치하야 루트는 소년만화 능력자 배틀물스럽게 시원스러운 전개였습니다. 가이아의 마물사 미도와의 대립이나 과감하게 차를 몰고 강당으로 돌진하는 요시노도 인상적이었네요. 요시노는 다른 루트에서도 코타로에게 여러모로 힘이 되어 줘서 좋습니다.

시즈루는 엉뚱한 구석이 있는 귀여운 후배입니다만 사실 그 정체는 가디언 소속 에이전트. 시즈루 루트는 치하야 루트와 얽히는 내용이 제법 많아서 치하야 루트 플레이 후에 하는 편이 좋을 듯합니다. 시즈루 귀여워요. 시즈루의 엉뚱한 상상도 재미있고. 이 루트에서는 시즈루의 과거사나 코타로와의 관계가 애틋하긴 했습니다만, 저는 코토리가 안쓰러웠어요. 이 루트에서 코타로가 시즈루에 대한 마음을 대놓고 코토리에게 밝히는데 코토리가 착잡해하면서도 응원해 주는 모습이 짠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코타로와 시즈루를 위해 코토리가 남몰래 희생하는 모습도요.

루치아는 원리원칙을 중시하는 완고한 성격의 반장. 주변에 선을 긋고 행동하는 데다 결벽증 기질 때문에 묘하게 고립되어 있는 입장입니다. 사정상 유일한 친구는 시즈루뿐. 루치아 루트는 이노우에 실종 이후 탐색에 나선 오컬연이 파탄나는 과정을 거치지 않는 유일한 루트네요. 다들 각자의 사정으로 흐지부지 멀어지게 됩니다만. 이 루트에서는 루치아와 치하야의 투닥거림이 귀여웠어요. 서로 부딪히고 후회하며 손을 내밀게 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시즈루나 루치아 루트는 가디언 멤버들의 활약이 좋네요. 다른 루트 타면 거부감 드는 모습을 잔뜩 보여주는 니시쿠죠나 이마미야의 다른 일면이 드러나고 에사카나 겐 등도 호감이 갑니다. Terra 루트에서는 에사카 씨가 엄청 젊게 나와 깜놀. 그 몇 년 사이 맘고생 심하게 해서 폭삭 늙은 건가요…? 그러고 보면 기억을 잃은 코타로를 다시 보며 에사카나 지인들은 이래저래 착잡했을 듯.

아카네는 오컬연 회장으로 신비한 현상을 부정하는 현실주의자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정체는 가이아 소속 차기 성녀 후보. 치하야는 아카네 휘하 듯한데, 이상하게 아카네 루트로 들어가면 전혀 등장하지를 않네요. 중간에 이사갔다는 말만 나오고 끝. 내용이 전체적으로 가라앉은 분위기라 치하야를 빼버린 걸까요? 이야기 전개 중 코타로가 잊어버린 과거 속에 아카네와 연관된 적이 있다는 뉘앙스를 풍겨서 뭔가 했는데… 이 부분은 Terra 루트에서 드러납니다.

오컬연 소속 다섯 히로인을 모두 공략하면 열리는 Moon 루트. 코타로는 아무도 없는 언덕에서 종이를 펴놓고 무언가를 연구하는 소녀 카가리를 만나게 됩니다. 처음에는 경계하는 카가리에게 온갖 수모를 당하지만 끈덕지게 다가간 결과 친해지는데 성공. 카가리가 연구하던 내용은 언제나 멸망의 결말을 맞이하던 지구가 멸망을 회피해 존속하게 되는 희망의 가능성이었는데…

Moon 루트 중반까지는 이야기 전체가 단순한 패럴렐 월드인 줄 알았어요. 이야기 전개에서 이래저래 엿보이는 내용도 그렇고, 혹성의 표면적이 좁을 경우 오로라의 밀도가 너무 높아지면 세계가 다중화된다는 코멘트도 있었고 하니 각 히로인 루트는 패럴렐 월드일수도 있습니다만…

Moon 루트 후반과 Terra 루트를 보니 적어도 Terra 루트는 비슷한 진화 과정을 거쳐 비슷한 세계관을 형성한 미래의 이야기 같습니다. Moon 루트에서 언급된 내용 중 구제 후 인류가 멸망하면 과거와 같은 진화 과정을 더듬어 재진화가 이루어진다는 식의 서술이 나오는데요. Terra 루트는 카가리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같은 진화 과정을 거쳐서 같은 세계관을 형성했을 뿐이겠지요. 결국 얼핏 보면 똑같아 보이지만 다른 시간대의 다른 개체가 펼치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풀어서 표현하면 진화 -> 구제 -> 멸망 -> 재진화 -> (여러 번 반복) -> 구제 -> 멸망 -> (오로라 달에 흘러듦) -> 각 히로인 루트 패럴렐 월드 -> Moon -> 재진화 -> Terra 의 수순인 듯. 『Rewrite』라는 제목은 중의적인 의미겠습니다만, 작품 이름이 딱 어울리는 전개네요. 별은 오랜 시간을 들여 다시 덮어쓰기를 하고 있었던 건가 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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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rra 루트가 과거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결국 가장 미래의 이야기. 과거 시간대에서도 같은 과정을 거쳤을 테니 다른 루트에서도 코타로의 과거는 같을 테지만요. 다른 시간대의 다른 개체라 해도 Moon의 코타로가 다른 루트에서 벌어진 일을 기억하는 점이나 Terra의 코타로가 본능적으로 카가리에게 이끌리는 점을 비추어보아 생명에 깃든 혼은 동일하다는 느낌이 듭니다만.

Terra 루트 플레이하면서 처음에는 제한된 선택지에 고개를 갸우뚱했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납득이 갑니다. 그건 달의 카가리가 연구 끝에 뽑아낸 희망의 길이었네요. 다른 선택지는 선택해도 멸망으로 이르게 되는 다른 갈래겠지요. 과거에 선택한 적이 있을 수도 있고.

중간에 아카네를 구한 뒤 카가리와 조우했을 때에는 놓아준다 외에 다른 선택지를 고를 수도 있습니다만, 다른 걸 고르면 과거의 흐름이 되풀이되고 끝. Terra 루트가 마지막 구원의 기회였으니 완전한 멸망 확정이네요. 어쨌거나 Terra 루트는 달의 카가리가 찾아낸 흐름을 따라 가며 여러 고난을 거쳐 코타로가 결말을 고쳐쓸 수 있었던 덕에 결국은 해피 엔딩을 맞이하게 됩니다.

Terra 루트 자체는 무척 마음에 들기는 한데 달의 카가리와 지구의 카가리가 명백히 다른 개체라 살짝 미묘한 느낌이… 부활한 본도(포치?)와 함께 행복해 져라, 달의 카가리.

플레이 시간은 참 길었습니다만 꽤 재미있게 즐겼습니다. 중의적인 의미로 『Rewrite』라는 제목이 딱 어울리는 작품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게임 중간에 매피를 이용한 지역 탐색 파트가 있는데… 소소한 대화나 이벤트가 재미있기는 합니다만, 메모리의 프렌드나 퀘스트를 다 채우기는 좀 번거로운 듯. 모든 퀘스트 다 채우면 숨겨진 루트가 열린다는데 챙겨보기 귀찮아요…;;

그리고 시스템이 정말 편리했어요. 기본적인 건 다 갖추었고 되감기나 빨리감기 기능도 편리했음. 선택지 점프 기능도 읽지 않은 부분이 있으면 그 부분에서 알아서 멈춰줘서 안심하고 쓸 수 있었습니다. 다른 게임에서 선택지 점프 기능은 안 읽은 부분도 통째로 넘어가서 난감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