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가가 문고 창간과 함께 발매된, 유명 에로게 시나리오 라이터 다나카 로미오의 소설 데뷔작입니다. 1권 작가 후기에 보면 건전한 생활을 위해서 작가 펜네임을 검색해 보지 말라는 둥 ‘윈도우용 애플리케이션 소프트에 사용되는 텍스트 작성’을 생업으로 한다는 둥 자신의 본업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걸 회피하고 있는데, 정발판 소개문에는 떡 하니 작가의 대표작이 명시되어 있으니 작가의 노력이 허망하게만 느껴지네요. 뭐, 아는 사람은 다 알고 보는 거겠습니다만… 국내에서는 J노벨에서 4권까지 정발되었습니다. 지난달 19일에 일본에서 5권이 발매되었네요.
일찍이 지구를 지배하던 인간이 쇠퇴하여 신장 약 10센치 정도의 자그마하고 신비로운 존재 요정에게 신인류의 자리를 내어주고 구인류로 물러나 서서히 멸망을 향해 나아가는 먼 미래의 이야기. 화자인 ‘나’는 그저 편할 것 같다는 이유로 인간과 요정의 교두보 역할을 담당하는 조정관이 되기로 진로를 결정, 조정관 사무소의 소장인 할아버지 밑에서 일하게 됩니다. 국제연합 소속 국제공무원인 조정관은 요정과 인간 사이의 충돌과 마찰에 대처하고 양측의 원만한 교류를 이끌기 위해 만들어진 직책이지만, 요정님은 좀처럼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에 존재의의가 희미해진 지 오래이지요. 편한 것도 좋지만 보람된 일을 하고 싶다고 투덜대는 ‘나’는 요정님을 납치하고, 먹을 걸로 회유하는 등 요정님과 이런저런 교류를 통해 요정님과의 친목을 다져나가지요.
기본 설정은 암울한데, 귀엽고 잔잔하고 평온한 분위기로 잘 포장해 놓은 작품입니다. 1권은 좀 지루한 편이었는데(‘나’랑 할아버지가 주구장창 인류 진화에 대한 담론을 늘어놓을 때, 마치 국사 교과서 초반부 읽는 듯한 느낌이 물씬물씬), 2권이 꽤 재미있었어요. 2권 전반부 ‘인간님의, 약육강식’ 편에서 개체의 지능과 크기 차이로 인한 인식 범위의 차이가 드러난 부분이 흥미진진했습니다. 종종 다른 개체 간의 상대적 인식의 차에 대해 막연히 상상해 본적이 있어서… 후반부 ‘요정님의, 시간활용법’에서는 주인공의 선배격인 조수님이 첫 등장. 처음엔 할아버지의 말씀을 토대로, 주인공이 낯가림이 심하고 소심하니 균형을 맞춰 붙임성 좋고 호쾌한 청년이 등장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만… 예상외였네요. 아궁이 숲 루프와 여러 명의 ‘나’와의 만남, 하이텐션 조수님이 강렬했습니다. 손나 바나나~ 라든가. 3권에서 인상 깊었던건 조수님의 잔혹동화네요.
권말에 ‘요정님과 관련하여 이런저런 트러블이 있었지만, 별문제 없다능~. 조정관은 요정님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능~. 진짜임~ 믿어달라능~’ 식으로 필사적으로 발뺌하며 책임회피하는 내용을 늘어놓은 분기별 보고서가 인상적입니다. 도무지 책임회피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한 3권 보고서에서는 ‘그건 다 상황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능~. 당 조정관은 요정님들이랑 우주탐사기 2기와 친분이 있으니 선처해 달라능~.’이라는 내용으로 가득찬 변명이 좀 안쓰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