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미궁 그림 ~일곱 개의 열쇠와 낙원의 소녀~

동화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10세 소녀 헨리에타. 어릴적 부모님을 여의고 사촌인 그림 삼형제와 함께 한적한 산골 마을 하나우에서 행복하게 지내온 헨리에타는 줄곧 마을을 벗어나는 일 없이 나중에 어른이 되면 평범한 가정을 꾸려 행복하게 살 것이라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밤중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이끌려 숲 속에 들어선 헨리에타는 자신의 뒤를 쫓아온 삼형제중 막내 루트비히와 함께 이상한 소년을 만난 뒤 정신을 잃고…  오랜 잠에서 깨어난 헨리에타와 루트비히는 어느 새 자신들의 모습이 성장했고, 폐허가 된 하나우에 단 둘만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뭐가 어떻게 된건지 영문을 알 수 없는 두 사람은 행방불명된 소중한 가족 야코프와 빌헬름을 다시 만나기 위해 여행에 나서는데…

 

카린 엔터테인먼트가 내놓은 PSP용 여성향 연애 어드벤처 게임입니다. 제목에 들어간 ‘그림’이라는 단어에서 엿볼 수 있듯, 그림 동화를 모티브로 삼아 그림 동화의 캐릭터와 이야기를 어레인지한 메르헨 고딕 판타지 세계관을 배경으로 펼져지는 헨리에타의 모험담이에요. 각 동화 뿐만 아니라 헨리에타가 찾아나서는 행방불명된 두 사촌오빠 야코프와 빌헬름도 그림 형제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네요. 이야기의 세계관은 독일풍을 기반으로 한데다, 북유럽 신화를 차용하는 등…전체적으로 독일 분위기가 물씬 풍깁니다.

공략대상은 사촌형제이자 소꿉친구인 루트비히, 수전노 피리연주자 하멜른, 순수하고 과격한 소년 빨간모자, 탑안에서 게임 삼매경에 빠진 히키코모리 오타쿠 라푼젤, 마왕의 저주에 걸려 개구리로 변해버린 개구리 왕자, 마법사의 저주에 걸려 백년 동안 잠든 사디스트 남매 가시공주와 가시왕자, 헨리에타와 루트비히가 애타게 찾고 있는 행방불명된 두 오빠 야코프와 빌헬름, 수수께끼 같은 말만 남기고 어린 헨리에타와 루트비히를 긴 잠에 빠뜨린 몽마 등 총 10명.

1회차 때 공략 가능한 건 마녀 헬레의 음모와 연루되는 하멜른, 빨간모자, 라푼젤 세 명. 세 사람 루트는 사건의 핵심보다는 세 사람이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고 끝나는지라 제대로 진실이 밝혀지지 않은 채 어정쩡하게 엔딩을 맞이하지만, 마왕 루트가 개방된 후 각 캐릭터 엔딩을 보면 열리는 후일담에서 이야기가 마무리됩니다. 라푼젤은 루트 자체도 가벼운 편이지만 배드엔딩은 무지 웃기네요. 오타쿠 생활에 향수를 느껴 오타쿠 생활과 동료와의 여행을 병행하는 라푼젤…;;

루트비히는 어릴 때부터 헨리에타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데다, 줄곧 헨리에타를 지탱해 준 인물. 현세상의 진실과 마왕의 정체가 밝혀짐에 따라 심각한 전개가 펼쳐지는데… 가족을 잃고, 자신의 꿈인 그림을 잃어도 소중한 헨리에타를 지켜냈으니 일단은 해피엔딩. 다른 캐릭터 루트에서 헨리에타 곁을 떠나 다른 길을 걷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좀 안쓰럽더군요.

개구리 왕자는 싱거웠습니다. 그림으로 그린 듯한 왕자님다운 태도와 개구리 모습의 차이 때문에 생기는 괴리감이 포인트인데 이걸 빼면 참 개성없고 재미없는 캐릭터가 되어버리네요. 너무 전형적인 왕자님이라… 중간에 가시공주가 낀 삼각관계 형성도 좀 질척하고 엔딩도 전형적이라 썩 마음에 안들어요. 개구리 왕자는 그냥 조역으로 활약하는 모습이 더  빛이 나는 듯….

마지막에 동료가 되는 가시공주는 1회차에선 코빼기도 못본 채 끝나고… 나중에 마왕 루트로 들어갈 수 있게 되면 덤으로 가시왕자(비중이 매우 없음…)를 달고 동료로 참가합니다. 개구리 왕자의 본모습에 반해 연모의 마음을 불태우고 있는데… 개구리 왕자랑 가시공주는 제법 잘 어울릴 것 같아요. 가시공주 루트에서 결국 백합노선 타지만…가시공주 엔딩에서 헨리에타를 두고 가시공주와 루트비히의 신경전을 펼치는 모습이 재미있었어요. 결국 루트비히가 맥없이 패배하는 모습이 좀 불쌍…;; 가시왕자 루트는 후반에 명계재판이 웃겼어요. 같은 왕자라도 개구리 왕자보다 이쪽이 더 개성적이네요. 비록 비중은 매우 낮아 공기 수준이고, 활약도 별로 없었지만…

헨리에타와 루트비히가 여행하는 목적은 행방불명된 야코프와 빌헬름 찾기. 자신들만 덩그라니 남겨두고 사라진 오빠들을 찾아 헤메던 두 사람앞에 펼쳐진 진실을 잔혹했으니… 진상은 부녀 싸움에 휘말려 해체 되어버린 한 가족의 비극…이라고 해도 되려나요?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진 꼴. 지나치게 권위적이고 가부장적인 아버지상은 좋지 않아요… (약간 왜곡 있음)

빌헬름 오빠는 대놓고 천연이라 귀여워요. 상비약으로 안약과 위약, 감기약을 들고 다니는 불쌍한 중간관리직 빌헬름 오빠…;; 만난 적도 없는 하멜른이 위통으로 고생하는 빌헬름의 상황을 정확히 꿰뚫어 봤네요. 무능한 부하와 흉폭한 상관 사이에 끼어 얼마나 고생을 해댔으면…;; 원래 저렇게 온화한 사람이 속앓이를 많이 하는 법이지요. 빌헬름은 온화한 성품과 외모 덕분에 주변으로부터 인기몰이를 하는데… 오카마 해골 선장과 마녀 헬레 일당의 반응이 재미있더군요.

몽마는 사건의 배후에 깊이 연루된 악당 캐릭터처럼 보였으나… 의외로 귀여운 구석이 있는 순애보 캐릭터였다는 사실 때문에 좀 놀랐습니다. 제대로 표현을 못해서 그렇지 헨리에타를 무지무지 걱정하고 신경쓰는 순정남이었음…;; 결국 비극적인 끝을 맞이한다는 게 안쓰럽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하멜른이랑 빨간모자 루트에서 퇴치당한 몽마가 좀 불쌍한 것 같은 느낌. 가시왕자 루트에서는 명계에서 헨리에타를 도와주기도 하는데… 이 녀석, 명계에 있는 걸 보면 마왕에게 반항하다 결국 죽은 걸까요…? 아님 몽마는 명계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건지…

모든 캐릭터 엔딩을 보면 열리는 그랜드 엔딩에선 전혀 구원의 여지가 없어 보이던 야코프가 구원받고, 예전처럼 화목한 네 가족이 다시 모여 행복을 되찾게 되네요. 야코프는 본인 루트에서조차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건만… 이렇게 그림 가족이 행복해지는 모습을 보니 흐뭇합니다.

이전 작품에 쓰인 선택지 시간제한 시스템은 여전하군요. 이전작처럼 애니메이션풍 기술 시전 화면이나 컷인 등 역동적이고 화려한 연출이 첨가되서 그리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네요. 카린의 전작인 『단죄의 마리아』는 별로 안 땡기는 나머지 그냥 건너 뛰어서 비교 못하겠는데,  전전작인 『프린세스 나이트메어』보다 훨씬 좋았습니다. 연출이 더 세련되어진 것 같아요. 이야기도 전체적으로 균형 있게 잘 짜여져 있고… 툭 까놓고 말해 전전작의 시나리오가 좀 구리긴 했죠.

독특하고 기묘한 메르헨 세계관과 그에 잘 어우러지는 음악과 예쁜 그림체가 매우 마음에 드는 작품입니다. 등장 캐릭터가 입체적이고 매력적이어서 좋더군요. 초반엔 심술궂은 악당처럼 보였던 마녀 헬레 삼인방이나 몽마도 제법 귀여운 구석이 있고… 중간중간 메인 캐릭터 외에도 다른 동화 캐릭터들이 찬조출연해서 즐겁습니다. 그림동화나 메르헨을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