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금 여성향 게임 브랜드 Snapdragon에서 내놓은 데뷔작입니다. 일러스트가 예뻐서 전부터 체크해 뒀던 게임이에요. ‘붉고 푸르게 얼룩진 달’에서 태어나 19년 주기로 회춘을 반복하며 긴 세월 동안 숙적 다오스와의 싸움을 이어온 윙필드의 영주 비비안과 그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주인공 비비안은 여성향 게임에서 보기 드문, 참으로 자유분방한 여왕님 타입이네요.
공략 대상은 도시에서 연수차 내려온 수습 집사 크리스토퍼, 윙필드가의 빈틈없는 집사 에드릭, 언제나 빈둥거리며 술을 달고 사는 노집사 다우스, 어려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엄청난 독설가인 메이드 장 페튜니아, 군것질과 목욕을 좋아하는 유쾌한 애완동물 핫카쿠, 능글맞은 요리장 티즈 등 총 6명. 캐릭터별로 에로 비중이 다르네요. 티즈는 완전 색기 담당이고, 크리스토퍼랑 에드릭은 그럭저럭인데… 다우스는 색욕을 떼어낸 탓에 고자, 페튜니아는 의욕은 넘쳐나는데 몸이 여자라 불가, 핫카쿠는 정신연령이 어린애 수준인데다 딱 한 번뿐이라는 발정기가 안 와서 동정. 핫카쿠는 그 대단하다는 드래곤의 발정기 얘기가 결국 안 나오고 끝나서 좀 아쉽기도 하고…
부제에서부터 ‘finite loop’라 나오기에 일반적인 루프물을 생각했는데, 이 이야기에서는 19년 주기로 반복되는 비비안과 다우스의 기나긴 싸움을 뜻하는 말이었네요. 이 싸움은 두 사람이 태어나고 나서 약 1900년간 이어져 왔다는 듯. 1900년간이라 해도 쉴 새 없이 싸움만 하는 건 아니고, 비비안이 아기로 돌아가서 13세가 될 때까지는 다우스가 강제적으로 무한도서관에 봉인되기에 실제로 두 사람이 충돌하는 기간은 19년 중 6년간이라고 합니다만…
주인공 비비안이 자유분방한 건 좋은데 후반부에 너무 가볍게 노선을 갈아타서 좀 거슬립니다. 자유분방한 거랑 줏대 없는 건 다르지요. 최종결전 때 선택지 한끝 차이로 엔딩이 갈팡질팡하는 게 아무래도 문제인 듯합니다. 일관성이 없잖아요…;; 크리스토퍼 루트는 그렇다 치고 다른 루트 타다가 막바지에 선택지 좀 다른 거 택했다고 크리스토퍼 엔딩으로 빠지는 건 좀 어이없었어요. 여지껏 달려온 루트는 깡그리 무시한 채, 옆에서 오랫동안 비비안 곁을 지키던 다른 애들도 냅두고 어째서 크리스토퍼를 선택하는 건데…;; 첫눈에 반한 걸로 만사 오케이? 다른 애들은 찬밥신세? 최종결전 직전까지 캐릭터 루트 진행한 건 대체 뭐가 되는 거냐!
비비안과 다른 캐릭터 사이는 그럭저럭 이해가 가는데, 크리스토퍼 쪽은 감정 흐름도 이야기 전개도 정말 뜬금없어요. 오랜 시간 비비안을 중심으로 깊고도 질긴 인연을 맺어온 뭇 남정네들과는 달리 크리스토퍼는 외지인이라 관계성도 약하고 붕 떠있는데다, 후반부에 갑자기 새치기해서 비비안 옆을 꿰차는 게 구도가 영 껄끄러워서… 최종 결전 때 밝혀지는 진실도 억지로 끼워 맞춘 느낌이고. 크리스토퍼 자체도 메인 히어로로서 전혀 매력을 못 느끼겠는데, 스토리 진행도 그 모양이니 김빠진달까… 도대체 무엇 때문에 얘한테는 엔딩을 몰아주면서, 왜 다른 캐릭터는 달랑 엔딩 하나에 다들 뭔가 찝찔한 결말만을 남겨주고 끝나는지…;;
전생에서는 충직한 기사, 현생에서는 성실한 집사. 비비안이 처음으로 애착을 품은 인간, 불문율이 깨진 계기, 비비안과 마법으로 혼이 묶였다는 사실 등등… 여러모로 에드릭은 비비안과의 관계나 설정이 딱 메인감인데 이 게임에서는 취급이 안습해서 안타깝습니다. 에드릭 외에도 비비안을 둘러싼 캐릭터들의 사연을 늘어놓으면 다들 구구절절한데, 다른 쟁쟁한 라이벌들이라면 몰라도 중간에 갑툭튀한 크리스토퍼에게 빼앗기는 건 좀…;; 크리스토퍼 엔딩보다 하렘 엔딩이 더 타당한 결말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하렘 엔딩 보고 진 엔딩이라 생각한 건 이번이 처음.
여러모로 크리스토퍼가 문제예요. 제 눈엔 얘가 이야기의 불순물로밖에 안 보여요. 여차하면 크리스토퍼 엔딩으로 빠지는 것도 영 마음에 안 듭니다. 쓸데없이 크리스토퍼에게 엔딩을 몰아넣지 말고 다른 공략 캐릭터도 좀 신경쓰지…ㅜ.ㅜ 비비안이 이야기의 핵심인물이긴 한데 주인공이라고 하기엔 위치가 좀 어중간한 것 같습니다. 크리스토퍼 루트 때 특히 그렇게 느꼈어요. 크리스토퍼 루트에서는 완전 크리스토퍼 시점 중심으로 펼쳐져서 크리스토퍼가 주인공스러운 느낌이 듭니다. 다른 루트에서는 이미 익숙해진 건지 크리스토퍼 루트보다 더 나은 건지 그렇게 거슬리진 않았지만요. 미묘한 BL 요소도 살짝 걸리긴 하는데 못 견딜 정도는 아니네요.
앞에서 꿍얼대긴 했는데 사실 전 이 게임이 꽤 마음에 들어요. 과거 긴 시간에 걸쳐 얽히고설킨 관계가 각 루트 내용을 짜 맞추면 전체상이 완성된다는 게 제법 좋더군요. 루트를 진행하다 보면 그 루트 내용만으로는 고개를 갸웃거릴 내용이 조금씩 섞여 있는데, 다른 루트에서 드러나는 사실을 알게 되면 아귀가 맞거든요. 힘 빠진 최종결전과 썰렁한 엔딩을 제대로만 뽑아내 줬다면 정말 좋았을 성 싶은데… 과거 관계는 치밀하게 잘 짜놓고 마지막이 그게 뭐냐고요.
덧붙이자면 주인공이라 불리기 무색한 비비안의 입장을 바로 세워줬으면 좋았을지도. 비비안이 아닌 공략 캐릭터의 심리 중심으로 전개되는 탓에 주인공에게 감정이입하며 플레이하시는 분은 좀 불편하실 것 같네요. 언제나 제삼자 시선에서 이야기를 지켜보는 저로서도 크리스토퍼 루트만큼은 괴로웠습니다. 이건 유난히 제가 크리스토퍼에게 유독 정이 안 가는 탓도 있으려나요. 이건 단지 시점 문제뿐 아니라 크리스토퍼 루트가 허접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 외에 윙필드에 사는 다양한 인물과 훈훈한 관계가 마음에 들어요. 조연들이 다들 개성 넘칩니다. 간간이 등장해서 분위기 띄우는 것도 좋고. 그나저나 격추 이벤트에서 비비안이 조연 캐릭터랑 노는 장면을 그냥 텍스트 처리하지 말고 CG도 곁들여주면 좋았을 텐데… 노엘이랑 해리가 정식 공략 대상이 아니라 참 아쉽습니다. 노엘이 참 빛나는 외모건만 아깝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