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250년간의 기나 긴 내전 끝에 간신히 재통일된 신생 사딜 왕국. 평화로운 세상이 찾아왔으나 마냥 기뻐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바로 대대로 암살을 업으로 삼아 온 키노자 마을 사람들이었습니다. 키노자 마을에 사는 16세 소녀 티에사는 어릴 적부터 예비 암살자로서 훈련받으며 자라왔지만, 평화가 찾아온 바람에 실전 한 번 치르지 못하고 암살업을 접게 생겼지요. 그러던 어느 날, 암살자가 되기 싫어 가출했던 오빠 루신이 찾아와 티에사에게 성 그리셀다 학원에 입학할 것을 권유하는데…
총 5권으로 완결된 『성 그리셀다 학원』 시리즈 첫 번째 이야기입니다. 작가인 아유카와 하기노는 두 사람으로 이루어진 콤비라고 하네요. 아유카와가 문장 담당, 하기노가 줄거리 담당인 모양. 이번 작품은 작가의 전작 『거만 무녀와 재상 폐하』 시리즈와 세계관이 같다고는 하는데, 직접적으로 연관은 없는 모양입니다. 간신히 이루어진 평화라든가, 예비 암살자 출신 주인공이라든가, 물밑에 도사린 음모라든가, 설정 자체는 심각한데 작품 분위기는 가볍습니다. 이런저런 좌충우돌 속에 피어나는 주인공 커플의 풋풋한 학원 로맨스…?
예비 암살자 티에사는 소심하고 낯가림이 심한 소녀로, 소녀 소설을 사랑하며 마을 밖 세상에 환상을 품고 있습니다. 사딜 왕국 재통일로 마을의 앞날이 막막한 판국에, 오랫동안 주군으로 섬겼던 라엔하르스가의 영애 호위 임무 의뢰와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한다는 오빠 루신의 강력한 권유에 따라, 티에사는 성 그리셀다 학원에 발을 들여 놓게 됩니다.
성 그리셀다 학원은 평화의 상징이자, 장차 왕국을 이끌어 갈 인재들을 양성할 배움의 장으로 문을 열었으나… 신생 사딜 왕국도 그렇고, 그 축소판인 성 그리셀다 학원도 그렇고 아직 완전한 의미의 평화와 화합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신생 사딜 왕국은 아직 여러 가지 불씨가 도사리고 있는데… 오랜 시간에 걸쳐 박터지게 칼 겨누며 싸워온 여러 가문 사이의 은원과 여러 집단의 음모가 뒤엉켜 있지요. 현재 사딜 왕국은 국왕을 상징적 존재로 내세우고, 실질적인 정치는 9공가를 중심으로 한 합의제 체제. 9공가 중 가장 힘이 약했던 가르하드가의 당주가 왕으로 추대된 것뿐이라, 남주인공 키아스는 말이 좋아 왕자님이지 그리 실속 있는 위치는 아닙니다.
티에사가 그간 암살자로서 쌓아온 시간과 노력이 무로 돌아가고, 암살자의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는 상황. 티에사가 필사적으로 정체를 숨기려 노력하는 와중, 여자 기숙사에서 살인으로 의심되는 사건이 벌어지고… 입학식 때부터 티에사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추궁해대던 왕자 키아스와 그 사건의 진상을 좇게 되면서, 그가 자신과 비슷한 처지임을 알고 공감하며 호의를 품습니다. 키아스는 물론이고 붙임성 좋은 룸메이트 핌과 라엔하르스가의 공자 네이쥬와의 교류를 통해 점차 학원에 애착을 품고, 새로운 시대에 자신의 능력이 보탬이 되기를 바라는데…
그리고 티에사에게는 암살자라는 사실 말고 또 다른 비밀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키노자 마을의 수호신인 신령님을 섬기는 측근이라는 사실이지요. 이 신령님은 평소에 고양이 모습을 가장하고 있는데, 그 모습과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건 측근인 티에사뿐. 키노자 마을 사람들은 신령님의 은총을 받아 뛰어난 신체능력을 얻고 이를 활용해 암살업으로 먹고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신령님의 측근인 티에사는 더욱더 큰 은총을 받았고요. 신령님의 비밀이 마을 밖으로 새어나가는 것은 금기이기 때문에 티에사는 이를 감추려고 전전긍긍 상태이나, 룸메이트 핌에게는 특별한 사정 덕에 신령님의 존재를 들켰네요. 신령님은 아마도 사딜 왕국의 수호하는 성수 ‘우아하고 아름다운 백조’와 동격 혹은 그 이상의 존재인 모양이지만…
어쨌거나 무사히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 왕국과 학원의 평화를 지켜낸 티에사와 키아스. 상대방을 향한 어렴풋한 연정이 싹트는 상태에서, 두 사람 앞에 어떤 사건이 펼쳐질지 궁금하네요. 아직 불안한 평화이지만, 미래를 위해 노력하는 티에사와 친구들이 있으니 상황은 나아지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