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 비취의 물방울 ~비색의 조각 2~ 포터블

산과 바다로 둘러싸인 와타츠미 마을에는 세상에 재앙을 부른다는 ‘용신’을 봉인한 ‘와타츠미 신사’가 있습니다. 대대로 용신을 봉인하는 무녀 ‘타마요리히메’의 혈통을 이어받은 스즈는 용신의 재앙을 막으려던 어머니와 사촌 언니 마오가 실종된 후 타마요리히메의 역할을 짊어지게 되지요. 그러나 두 사람이 희생했는데도 다시 용신의 재앙이 시작되려는 징조가 보이고, 스즈의 눈앞에 행방불명이던 사촌 언니 마오가 4명의 요괴를 거느리고 나타나는데…

 

여성향 브랜드 오토메이트의 인기작 『비색의 조각』의 후속편입니다. 원래 PS2판으로 오리지널판 『비취의 물방울 ~비색의 조각 2~』가 나왔으나 이런저런 악평이 쏟아졌고, 나중에 시나리오를 갈아 엎고 『진 비취의 물방울  ~비색의 조각 2~』란 제목으로 리메이크판이 나왔습니다. 대체 게임 내용이 얼마만큼 심각했기에 동일 포맷으로 리메이크판이 나왔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제가 플레이한 건 리메이크판을 베이스로 추가요소를 넣어 이식한 PSP판입니다.

공략대상은 어린 시절부터 스즈를 지켜온 소꿉친구이자 유일한 수호자 시게모리 아키라, 복수를 위해 마을로 흘러들어 온 미부 카츠히코와 그 남동생 미부 코타로, 사촌 언니 마오의 약혼자이자 마을 유지 아마노가 출신인 아마노 료지, 어머니와 사촌 언니가 사라진 후 마지막으로 남은 혈육인 스즈의 남동생 타카치호 리쿠, 자칭 덴랴쿠료의 엘리트 카모 야스노리, 숨겨진 공략 캐릭터로 토요타마히메를 섬기는 요괴 중 한 명인 미코시바 케이 등 7명. 이야기 전개는 아키라와 리쿠, 카츠히코와 코타로, 료지와 야스노리가 각각 짝을 지어 진행하다가 개별 루트로 갈립니다. 케이는 야스노리 루트에서 파생되네요. 캐릭터 공통 진행 부분이 많이 겹칩니다.

오리지널판을 안 해봐서 그것과 비교는 못 하겠고… 전작 『비색의 조각』보다 볼륨이 작고, 독기가 쫙 빠지고, 이야기 서사도 단조로워졌습니다.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상황에 따라 바뀌던 세력 구도와 인간관계와 인물상도 전작과는 달리 단순하고. 전작에서는 루트에 따라 이야기 전개와 인간관계가 몇 번이고 뒤집혀 긴박감을 유지했는데, 이번 이야기는 모든 루트가 단조로운데다가 대체로 흐름이 같아요. 오리지널판에서는 전작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모양이지만, 리메이크판에서는 스토리를 싹 다 뒤엎어서 덴랴쿠료 외에는 전작과 크게 연결고리가 없습니다. 굳이 간접적인 연결고리를 따지자면 야스노리가 선배 두 사람을 슬쩍 언급하는 정도.

아무것도 모르는 백지 상태에서 모든 것을 쌓아 올려야 했던 타마키와는 달리, 이번 주인공인 스즈는 어릴 때부터 계승자 후보로 자라온데다 미부 형제를 제외하고는 다른 등장인물과도 이미 친교를 쌓은 상태입니다. 타마요리히메 감시를 위해 파견된 덴랴쿠료 요원 야스토리와 에리카도 이미 정체가 들통 났어도 스즈와 교우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그런데 스즈와 주변 인물 사이에 유대와 인연이 거의 안 느껴져요. 캐릭터들이 다른 이들에게 그리 관여 안 하고 제각각 움직이기도 하고요. 가끔 모여 신뢰라는 둥 유대라는 둥 힘을 합치자는 둥 얘기해봤자 겉치레라는 느낌 뿐.

전개상 여기저기 딴지 걸고 싶은 부분이 많습니다. 토요타마히메가 원한을 품게 된 계기도 시시하고… 토요타마히메와 마오를 같은 처지에 놓고 비교해 타마요리히메-토요타마히메, 스즈-마오로 짝지을 수 있는 질척한 전개가 필요했을 것 같은데 이게 철저히 배제되어 오히려 위화감만 들어요. 마오의 어두운 내면과 갈등을 부각시켰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밖에도 잘 살렸으면 빛났을 소재와 설정이 많은데, 아깝게 묻혀버린 느낌이…;;

또한 이야기 내내 강한 적이라느니 재앙이라느니 숙명이라느니 무게 잡고 떠들지만, 마지막에 적들이 다들 맥없이 나자빠져서 대체 그동안 무슨 뻘소리를 늘어놓은 건지 어이없는 마음마저 들 정도입니다. 수호자가 다 모여야 이길락 말락 하다더니, 마지막엔 스즈랑 공략 대상이 적과 맞서 싱겁게 끝나니 그동안 무게 잡던 건 뭐냐 하는 생각이 물씬물씬. 물론 무거운 척해도 가볍게 느껴지긴 했지만요. 사랑과 유대의 힘으로 적을 물리치고 모든 일이 잘 풀려 안이한 해피엔딩을 맞이하는 모습도 좀…;; 여기 등장인물들은 1편의 처절함을 견학하고 와서 자기들이 얼마나 배부른 소리를 했는지 반성해야 합니다. 아, 반성해야 할 사람은 시나리오 라이터인가. 하지만 갈아 엎고 다시 만들어도 이리 썰렁하니 오리지널은 과연 어땠을지…;;

이번 작품을 플레이해보니 전작 『비색의 조각』이 참 괜찮은 작품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어요. 텍스트와 이야기 전개가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긴 했지만, 이렇게 썰렁한 후속작이랑 나란히 놓고 비교하자니 역시…;; 그래도 전작과 마찬가지로 일러스트는 멋졌고, 중간중간 연출이 제법 괜찮았어요. 시나리오가 영 받쳐주지는 못 했지만, 캐릭터도 그리 나쁘지 않았고… 전작과 비교하지 않으면 그럭저럭 할 만할지도 모릅니다만… 속편이니 만큼 피할 곳이 없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