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이 세상에 신이 있다면

도쿄 교외, 모녀 가정에서 자란 쿠루미 하루카에게 어느 날 한 통의 편지가 도착한다. 그것은 7년 전 자신이 보낸 과거에서 온 편지였지만, 의미를 알 수 없는 말만이 늘어져 있을 뿐. 분명 장난이리라 생각하고 변치 않는 일상을 지내려 하던 차에 같은 편지가 동급생인 에이스, 네지, 쿄, 슈리에게도 도착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들은 편지를 계기로 숨겨진 비밀과 마주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들은 깨닫게 된다. ──이 ‘세상’은 어딘가 조금 이상하다고… 과연 푸른 바다 너머에 숨겨진 이야기의 진실이란…?

 

리젯에서 발매한 여성향 게임입니다. 일러스트가 그리 취향이 아니라서 별 관심이 없었는데, 어찌어찌 하다 보니 플레이해봤습니다. 평가는 호불호가 꽤 갈리던데, 그래도 호평이 있기는 하니까 망겜은 아니리라 굳게 믿으며…

일본 신화를 바탕으로 한 기담 같은 이야기네요. 부드러워 보이는 일러스트에 속기 쉬울 거 같지만 폭력, 유혈, 협박, 감금, 근친, 집착 등 온갖 자극적인 소재로 뒤범벅된 딱 리젯스러운 게임입니다. 등장인물들이 다들 가정 불화와 학대에 시달린 피해자들이라 설정이 암울해요. 불편한 소재가 뒤섞여서 여러모로 굉장히 취향을 탈 것 같습니다. 스릴러물로써는 흥미진진했는데 달달하고 포근한 연애물을 바라는 분께서는 피해가셔야 할 듯.

공략 대상은 하루카와 같은 학교 학생인 과묵한 유망 테니스 선수 에이스, 쾌활한 유망 육상 선수 네지, 가족을 위해 열심히 알바 하며 생계를 꾸리는 쿄, 무척 머리가 좋지만 이를 일부러 숨기는 슈리, 하루카의 의붓 오빠인 마사토 등 총 다섯 명. 엔딩은 각 캐릭터별로 귀환, 혼돈, 멸망, 진상 엔딩 등 총 네 가지인데, 처음 공략 시 귀환 엔딩이나 혼돈 엔딩을 본 이후 진상 엔딩이 열립니다. 마사토는 공략 캐릭터 중 한 명의 진상 엔딩을 봐야 루트가 열리는 모양이더군요.

하루카를 둘러싼 묘한 상황이나 동급생 사이에 흐르는 아련한 기시감, 그들 주위를 멤도는 쿠키 삼형제의 암약 등… 하루카와 친구들이 이런저런 시련과 위기를 헤쳐나가며 현재 자신들이 사는 세계가 하루카의 몸 속에 깃든 여신 이자나미의 힘으로 만들어진 세계인 ‘네노쿠니’라는 진실을 알게 되고, 본래 세계인 ‘나카츠쿠니’로 돌아가기 위해 분투하는 이야기입니다. 귀환 엔딩은 친구들을 잃고 공략 상대와 하루카 단 둘만 귀환에 성공해서 찜찜한 기분이 드는데… 그 후 다시 루트를 타면 진상 루트에 다다를 수 있게 되네요.

네노쿠니는 하루카와 친구들의 소원을 바탕으로 형성된 공간이라 현실과 상황이 다른 유리 정원 같은 느낌인데… 언젠가 무너질 거짓 세상을 벗어나 괴롭고 힘들었던 현실로 돌아가 행복을 잡는다는 흐름은 나쁘지 않은 듯(진상 엔딩 외에는 대체적으로 캐릭터를 험하게 다루긴 하지만…).

다른 루트를 탈 때 얼핏 드러나는 오빠 마사토의 과거나 행각이 범상치 않아서 과연 이 인간과 제대로 연애 루트가 성립될지 의문이 들었는데… 그건 맛보기에 불과했군요. 마사토 루트에 들어가니 이건 뭐 공포물이 따로 없음. 제작진도 상황이 심각하다는 걸 느꼈는지 이중인격 설정으로 면피하려는 시도를 한 거 같지만…;; 다른 루트에서는 하루카를 지탱해줄 만한 친구들이 있는데, 마사토 루트는 정말 꿈도 희망도 없군요. 막바지에는 집에서 하루카 지인들을 난도질 하는 장면까지 나오다니. 뭐, 리젯의 다른 게임 중 끝까지 개과천선은커녕 여주인공을 사랑하지도 않은 채 해치기까지 하는 희대의 미치광이 캐릭터도 존재하니 새삼 놀랍지 않은 거 같기도 하고.

본편에서 제대로 안 밝혀지고 두루뭉실하게 넘어간 부분이 좀 있는데, 스페셜 모드 중에 어나더 스토리를 다룬 ‘블랙 포스트 시나리오’에서 본편 상 애매했던 과거 이야기가 보완됩니다. 이 내용까지 다 봐야 비로소 게임을 다 끝냈다고 할 수 있을 듯. 네노쿠니로 넘어오기 전 소꿉친구들의 만남이나 과거 이야기 등은 나름대로 훈훈합니다. 각각의 가정사는 암울하지만…

쿠키 삼형제의 이야기도 있는데 본편 내내 아키라가 엄청 마마보이 티를 내서 좀 그랬습니다만, 과거 이야기 보니까 그럭저럭 납득. 스사노오의 그릇이었던 아키라도 과거에 엄마 관련 트라우마와 죄책감을 가지고 있어서 스사노오의 마마보이 기질에 깊게 동조했던 듯… 과거에 엄마를 구하지 못 했지만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엄마를 구원해서 속죄하겠다는 그런 느낌.

마사토 시점의 과거 이야기는 이건 뭐… 하루카가 너무 불쌍하네요. 엄마랑 단둘이서 이런저런 고생을 하다가 엄마의 재혼으로 새가족이 생겼지만 새아빠는 인간말종에 엄마는 애를 거의 방치하는 수준이고, 오빠 친구놈은 변태 새끼였던 데다 유일한 버팀목이었던 오빠에게도 배신 당한 거나 마찬가지라서 그 충격으로 그 당시 기억을 상실…

마사토가 취한 조치로 그나마 사후에 새아빠 문제는 해결된 거 같지만 그 상처는 여전히 남아 있고… 하루카가 오빠에 대한 충격적인 기억을 지워버린 것도 당연하다는 느낌이 드네요. 오빠가 유일한 위안이었는데 그마저도 망가졌으면 하루카가 도저히 못 버텼을 듯. 이사 간 후 친구들과 잠시 동안이라도 행복한 시간을 지내서 다행이다 싶긴 한데…

호불호가 갈릴만한 자극적인 소재에 내성이 있다면 해볼만한 게임인 것 같습니다. 이야기 짜임새도 꽤 괜찮았어요. 이 바로 직전에 플레이했었던 게임이 영 시원치 않아서 상대적으로 더 평가가 후해졌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나저나 게임에 쓰인 음악이 상당히 좋네요.